가벼워진 몸보다 더 가벼워지는 것은?
그날 아침, 평소처럼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물기 닦고, 속옷만 입은 체 체중계 위에 올랐다.
“삐-빅.”
79.8kg.
……정적.
전날 아무것도 안 먹었고, 심지어 저녁엔 미역국만 먹었는데? 아니, 왜?
체중계가 고장 났나 싶어 다시 내려왔다가, 무릎에 힘을 살살 빼며 다시 올라가 봤다.
“삐-빅.”
80.1kg.
……??
2초 만에 300g이 늘었다. 뭐지? 숨 쉬는 것만으로도 체중이 늘어난다고?
그때 문이 삐그덕 열리고, 10살 아들이 슬리퍼를 끌며 들어왔다.
내 체중계 위의 자학적 침묵을 멍하니 보다가 한 마디 툭.
“아빠, 그거… 혹시 지구가 아빠만 더 세게 당기는 거 아냐?”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들었고, 아들은 이어서 말했다.
“그니까… 지구가 아빠를 너무 좋아해서, 막! 데려가려고 막 더 잡아당기는 거지!”
그리고는 슬리퍼를 끌고 사라졌다.
방금 무심하게 던진 그 말이, 중력에 관한 가장 순수한 정의가 되어 내 뇌에 남았다.
이 상황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지금 중력에게 끌려가는 사랑꾼이었다.
거울 앞에서 내 모습은 또 어떤가?
수십 년을 성실하게 나와 함께해 준 아랫배를 마주하는 것은 슬프기까지 한 일이다.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 최대한 배를 집어넣었다.
“오? 오, 괜찮은데? 이 정도면, 약간 30대 느낌??”
뒤에서 아내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숨 쉬어. 숨! 거기서 죽으면 청소하기 힘들어.”
당황한 나는 어색함을 모면하려다, 침대 모서리에 정강이가 정통으로 부딪쳤다.
“악…”
바닥에 드러눕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닥이 나를 끌어당겼다.
누운 김에 잠시 누워 있었다.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난 왜 이렇게 자꾸 바닥에 진심일까?… 혹시 나만 중력이 더 세게 작용하는 건가?’
중력...
어쩌면 이건 중년에게 특별히 더 가혹한 우주의 진실일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요즘 삶도 점점 무겁게 느껴진다.
몸도 무겁고, 말도 무겁고, 분위기는 더더욱 무겁고.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중력이 줄어든다면… 세상도 좀 덜 피곤하지 않을까?”
중력이 하루 동안 0.8배로 줄어든다면, 그 안에서 나는 어떻게 살게 될까?
몸은? 감정은? 관계는?
나는 바닥에 누워 상상 속 중력 실험에 돌입한다.
실험명 : 지구 중력 0.8배 가정하의 인간 행동 및 정서 반응 실험
피실험자 : 50대 중년 남성 (본인) 전반적 중력 의존도 높음, 상체 무게 집중형
실험 배경 : 체중계 위에서 ‘지구가 나만 더 세게 끌어당긴다’는 일방적 물리학적 피해 의식을 기반으로 실험 착수.
가설 : 만약 지구의 중력이 0.8배로 줄어든다면, 내 삶은 조금 더 가볍고 유연해질 수 있을까?
실험 조건 : 중력: 평소의 80% 수준
날짜 : D+1
시간: 오후 6시 17분
장소: 우리 아파트 1층 계단 앞
상황 요약: 엘리베이터 고장. 28층 도보 등반. 중력 실험 1일 차.
엘리베이터 문에 붙은 A4용지.
‘점검 중입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내 눈은 그 문구를 3초 동안 쳐다봤고, 그 뒤는 입에서 자동으로 나온 한숨이었다.
“후… 또야?” 벌써 3일째다.
엘리베이터가 멈춘 것도, 내 인생이 멈춘 것도.
나는 그 안내문을 5초 동안 노려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계단 위로 끝없이 이어진 회색의 계단, 그리고 28층까지 올라가야 하는 내 현실.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
오늘은 실험 1일 차, 중력이 줄어든 세계를 체험하는 첫 날이다.
나는 계단 앞에 선다. 가슴께쯤에 허리띠를 조이고, 발등을 질끈 눌러 신발끈을 조였다.
“좋아, 해보자.”
1층에서 2층. 계단이… 가볍다? 두 칸씩.
“어?” 허벅지가 말을 듣는다. 무릎도 안 삐걱댄다.
4층. 호흡은 살짝 거칠어졌지만, 어디선가 등 뒤로 바람이 불어주는 느낌.
6층. 평소 같으면 벌써 허벅지에 쥐가 올 시간이다. 그런데 의외로 괜찮다.
9층. 발이 가볍다. 운동화 바닥이 계단을 툭툭 튕기듯 딛는다.
그동안 내 몸에 달려 있던 무형의 모래주머니가 오늘은 없는 것 같다.
12층. 중간에 멈춰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들어왔다. 숨이 차기 시작했지만, 숨소리엔 짜증이 없었다.
17층. 정강이가 미세하게 떨렸지만, 이건 ‘운동 중’의 떨림이지 ‘고통’의 전조는 아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머릿속에서 이상한 문장이 떠올랐다.
“내가 계단을 못 오르던 건, 몸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마음이 밑에 붙어 있었던 건 아닐까?”
21층.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 정도면 진짜… 나 ‘헬스장 인플루언서’ 각인데?”
그 순간, 초등학교 4학년쯤 돼 보이는 이웃집 아이가 엄마 손을 꼭 쥐고 계단을 올라오다 말없이 나를 힐끔 보더니 툭 말했다.
“아저씨, 왜 혼자 웃어요? 무섭게…”
나는 그 아이를 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응. 이건 실험이야. 과학 실험.”
그리고 혼잣말로 덧붙였다.
“심각한 중력 편향 현상에 대한 개인 연구라고나 할까…”
28층 집 앞 계단에서 본 세상은, 어제와 같은 곳인데 조금 더 높게 느껴졌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 몸이 무거웠던 게 아니라, 그 무게를 당연히 짊어져야 한다고 믿어온 내 마음이 지나치게 낮게 깔려 있었던 건 아닐까.
집 현관물을 열며 나는 문을 열기 전,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중력이라는 게, 꼭 물리적으로만 작용하는 건 아니구나.”
날짜: D+2
시간: 오후 6시 45분
장소: 우리 집 식탁
상황 요약: 중력 0.8배 가정하의 가족 저녁 식사.
식탁에 앉았다.
반찬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계란말이, 김치, 두부조림, 그리고 약간 타버린 멸치볶음.
아내는 평소처럼 말이 없었고, 아들은 여전히 유산균을 입에 머금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들었다.
그 순간, 숟가락이 예상보다 ‘가볍게’ 들렸다.
정확히 말하면, 들린 게 아니라, ‘떠올랐다’는 느낌이었다.
“오...?” 나는 무심한 척, 천천히 숟가락을 내렸다가 다시 들어봤다.
정확히 느껴졌다. 힘을 주지 않아도 된다.
내 근육이 아니라, 기압이 나를 도와주는 느낌.
그 순간, 아내가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한다.
“밥은 입으로 먹어요. 눈으로 먹지 말고.”
나는 그 말에 잠깐 멈칫했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중력이 줄면… 식사 예절도 부드러워지는지 보는 중이야.”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아들은 조용히 젓가락으로 계란말이를 집었다.
그리고 갑자기 말했다.
“아빠, 중력 줄면, 방귀도 덜 무겁게 나와요?”
순간, 식탁 위 공기마저 0.8배 가벼워졌다.
아내는 탁,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말했다.
“그 질문은 진짜 중력감 없네.”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공기도 덜 눌리니까 가벼워지고, 방귀는 분산된다. 공기저항이 줄어서.”
아들은 감탄했다.
“우와. 그럼 이제 공중 부양식 방귀 가능한 거예요??”
그리고는 만족스럽게 국을 한 숟갈 떠 넣었다.
아내는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진짜… 이 집 식탁은 언제부턴가 연구소가 됐어.”
그 말에 나와 아들이 동시에 말했다.
“실험은 생활 속에서 이뤄지는 거지.”
찰칵.
아내가 폰을 들어 우리를 찍었다.
“좋아. ‘오늘의 괴짜 아버지와 실험 보조원’ 단톡방에 공유 완료.”
나는 문득 생각했다. 무게가 줄면, 말도 덜 무거워진다.
평소 같으면 꺼내기 어려운 말들도 오늘은 훨씬 쉽게 테이블 위를 떠다녔다.
숟가락, 웃음, 농담, 눈치, 그 모든 것이 20%쯤 가벼워진 저녁.
그날 식탁 위엔 가벼운 음식, 가벼운 말, 가벼운 웃음이 올랐다.
중력이 줄어든 하루였지만, 우리 셋은 서로의 무게 중심을 아주 정확히 잡고 있었다.
날짜: D+3
시간: 오후 3시 30분
장소: 아파트 단지 놀이터
상황 요약: 아버지와 아들, 0.8배 중력 상태에서 동시 점프 실험.
느긋한 점심을 마치고 나른한 오후가 되자 아들이 말했다.
“아빠, 중력이 진짜 줄었다면... 오늘 놀이터에서 뛰면 하늘까지 닿지 않을까?”
나는 잠시 망설였다.
점프라니. 내 나이에. 이 뱃살에. 이 슬리퍼에.
하지만 아들의 눈빛은 이미 날고 있었다. 놀이터로 나갔다.
다행히(?) 놀이터엔 아무도 없었다. 해는 눈부시고, 모래 위엔 오후의 열기가 어른댔다.
나는 가방을 벤치 위에 내려놓고, 스트레칭을 했다.
아들은 신이 나서 말한다.
“아빠, 잘 봐요. 진짜 점프하면 공중에서 두 번 뜰지도 몰라.”
나는 웃으며 말했다.
“오, 이중 점프? 플래시 게임 하듯이?”
아들은 힘차게 점프했다. 텅하고 모래가 움찔하고, 작은 운동화가 허공을 가른다.
그 순간, 나도 점프했다. 물리적으로는 별로 안 떴다.
정말 조금, 겨우 발이 땅에서 떨어졌을까 말까. 하지만 느낌은 달랐다.
분명히 ‘올랐다’는 기분. 아랫배가 덜 내려앉았고, 허리에 잠깐 바람이 들었다.
아들이 내려오며 외쳤다.
“와아, 아빠 봤어요? 나 진짜 좀 떴어요! 아빠는… 음… 약간… 튀긴 두부 같았어요!”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표현 뭔데. 튀긴 두부는 탄력이 없거든?”
아들은 허리를 굽히고 웃더니, 다시 점프했다. 이번엔 더 높이.
팔을 휘저으며 허공에서 짧게 멈춘 듯했다.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빠, 나 지금… 살짝 외계인 된 기분이에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조금 늦게, 조금 더 세게 점프했다.
이번엔 살짝, 진짜로 떴다.
한동안 우리는 말없이 점프를 반복했다.
조금 덜 찬 숨, 조금 더 올라가는 웃음.
그리고 문득,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아빠란 존재는 언제부턴가 ‘안 뛰는 사람’이 되었구나.
늘 바닥을 딛고 있고, 늘 현실적이고, 늘 계산된 움직임만 하는 사람.
그런데 오늘, 나는 중력 0.8배 세계에서 아들과 함께 같은 타이밍에 떴고, 같은 타이밍에 착지했다.
아들이 웃으며 말했다.
“아빠, 우리 진짜 잠깐 하늘에 있었어요,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응, 그 하늘… 네가 만든 거였어.”
날짜: D+4
시간: 오전 5시 45분
장소: 현관 앞
상황 요약: 중력 1.0배 복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단 한 가지는 달라졌다.
오늘 아침, 눈을 뜨자마자 알 수 있었다. 내 몸이 다시 납처럼 무거워졌다는 걸.
욕실 슬리퍼는 발바닥에 철썩 붙었고, 양말을 신으려면 꼭 앉아야 했다.
현관 앞 운동화는 평소보다 딱 200g쯤 더 눌리는 것 같았다. 물론 기분 탓이다.
하지만 그런 기분은 틀린 적이 없다.
현관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면서 확신했다. 중력이 돌아왔다.
세상은 원래대로 무거워졌고, 나는 다시 ‘기지로 귀환한 우주 비행사’처럼 이 익숙하고 낯선 현실에 발을 붙여야 했다.
그런데 몸은 무거운데, 마음이 예전만큼은 가라앉지 않았다.
중력이 원상 복귀한 날, 나는 오히려 조금 더 가벼워진 채로 출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진짜 문제는 중력이 아니었는지도 몰라.”
우리를 짓눌렀던 건, 1.0이라는 수치가 아니라 ‘늘 무게를 버텨야만 한다’는 태도였을지도.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직장인으로서 무게를 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
그게 잠시 꺼졌을 때, 나는 오히려 비로소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실험은 끝났다.
지구는 다시 원래의 질량을 되찾았다.
하지만 나는 그 0.8배의 세계를 마음 어딘가에 조용히 저장해 두고 살기로 했다.
그곳엔 덜 무거운 말이 있었고, 덜 무거운 침묵이 있었고, 덜 무거운 가 있었다.
가끔은, 그 기억 하나만으로도 오늘 하루를 조금 더 가볍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무게란 결국, 세상이 나에게 거는 기대가 아니라 내가 나 자신에게 들이대는 기준일지도 모르니까.
에필로그 : 삶의 중력을 짊어지고 가는 모든 어른들에게
물론 모든 건 상상이었습니다.
진짜 중력이 줄어든 적은 없고,
그저 어느 일요일 아침, 문득 가벼워진 기분 하나를 붙잡아 혼자만의 실험처럼 굴려본 것뿐입니다.
손끝으로 느껴졌던 공기의 다정함, 계단을 오르던 발목의 낯선 탄성, 아이와 함께 허공을 밟았던 저녁의 웃음들…
다 지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그건 현실보다 더 또렷한 상상이었다는 걸.
우리는 매일의 무게 속에 살지만, 가끔은 그 무게를 잠시 내려놓는 상상이 가장 가볍고 단단한 위로가 되어준다는 것도요.
진짜여서 남는 감정도 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더 오래 가슴에 남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니 언젠가 너무 무거운 날이 오면, 나는 다시 이 실험을 떠올릴 겁니다.
중력이 살짝 낮아졌던 상상 속의 일주일.
그 가벼움이 마음 어딘가에 남아 조용히 나를 밀어 올리던 기억처럼,
당신의 삶도 조금은 가벼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무거워서 견딘 것이 아니라, 잠시 떠오를 줄 알아서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