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알고리즘 VS 아이들
"아들, 그만하랬지?!!"
나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진다.
벌써 1시간째 유튜브 화면 앞에서 넋을 빼놓고 있는 열 살 아들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올 리 없다.
30분만 보기로 약속했는데 이대로 두면 그냥 컴퓨터 화면 속으로 들어갈 태세다.
요즘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유튜브 보여주면 그때만큼은 조용해져요.”
부모들의 말투엔 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다. 안도, 죄책감, 그리고 약간의 체념.
이런 방법으로 아이를 조용히 만드는 게 나쁜 줄은 안다.
하지만 울고 떼쓰는 아이 앞에서, 피곤하고 지친 상황에서 놀아 달라는 아이에게 장난감보다 태블릿이 더 빠르고 확실한 해법이 된 지 오래다.
그러니 대부분은 그냥 켠다. “잠깐만 보여주자.”는 말과 함께.
나도 이해한다. 나도 종종 사용하는 스킬이니까 그 마음을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잠깐’이 반복되면, 그건 무엇이 되는 걸까?
정말 ‘잘 논다’는 게 맞는 걸까? 혼자 논다고 말하지만, 그 혼자에는 화면이 있다.
그 화면은 지금, 누구와 놀고 있는 걸까?
그런 질문들과 함께, 나는 상상 속으로 들어간다.
레고 조각처럼 내 머릿속은 실험실을 만들기 시작한다.
먼저, 밝은 조명이 고루 갖춰진 키즈카페를 만든다.
미끄럼틀과 작은 원형 테이블, 알록달록한 매트도 배치한다.
장난감은 치우고, 태블릿 10대를 바둑판처럼 배치한다.
각 기기엔 유튜브가 켜져 있고, 자동 재생은 ON.
스피커를 통해선 반복적이고 경쾌한 영상음악이 작게 흐른다.
가상의 아이들 10명을 불러온다.
눈높이, 손가락 길이, 반응 속도까지 조정 가능한 디지털 아이들.
하지만 이내 나는 설정값을 모두 꺼버린다.
아들과 동일한 진짜 열 살 아이들이 들어서야 하니까.
오늘의 실험자도 역시 나다.
높은 곳에서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편안한 의자를 준비한다.
모든 카메라는 켜지고, 로그가 기록된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태블릿 앞에는 인간의 순수함.
아직 세상의 논리를 배우는 중인 아이들.
다른 한쪽에는 클릭, 반복, 잔상으로 무장한 유튜브 알고리즘이라는 이름의 자극 설계 기계.
질문은 단순하다.
“누가 더 오래 집중할 수 있을까?”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더 복잡한 질문이 스멀거린다.
“이건 집중력의 대결인가, 아니면 존재 방식의 충돌인가?”
그렇게, 가상의 실험이 시작된다.
시작 10분
처음 10분간, 키즈카페는 전쟁터처럼 시끄럽다.
아이들은 소리친다. 손을 휘두르고, 서로의 화면을 보여주려 안달이다.
“와! 티라노 사우르스다!”
“이거 봐봐, 이거 봐봐!”
“엄마~ 나 이것도 봐도 돼?”
모든 게 빛나고, 빠르고, 소란스럽다.
영상은 쉼 없이 흘러가고, 음악은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아이들은 웃고 떠들고 눈을 반짝인다. 처음엔, 이 모든 게 그저 귀엽기만 하다.
그러나 그 활기가 화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곧 명확해진다.
영상은 아이를 자극한다.
자극은 반응을 이끌어내고, 그 반응은 알고리즘의 설계 목적 그 자체다.
아이들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 반응하고 있다.
그리고 알고리즘은 정확히 그 점을 노린다.
30분 경과
공간은 조금 조용해진다.
아이들은 여전히 화면을 보지만, 서로에게 말을 거는 일이 드물어진다.
손가락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화면은 스스로 계속 넘어간다.
자동 재생. 비슷한 유형의 콘텐츠 반복. 조금씩 강해지는 자극.
내가 보고 있는 건 ‘선택하는 인간’이 아니라 ‘끌려가는 존재’였다.
아이들은 더 이상 ‘본다’고 할 수 없다.
그저 ‘보게 되는 것’을 흘려보낼 뿐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주도권은 완전히 알고리즘에게 넘어갔다.
1시간 경과
상황은 확연히 변했다. 아이들의 말이 눈에 띄게 줄었다.
얼굴에 떠오르던 표정도 사라지고, 손은 무릎 위에 얌전히 놓여 있다.
서로 말도 섞지 않는다. 서로가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않는 듯하다.
모두가 같은 자세로 화면을 바라본다. 고요하게, 그리고 무표정하게.
나는 섬뜩한 기시감을 느낀다.
화면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화면에게 바라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유튜브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튜브가 아이들의 집중을 흡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실험에서 알고리즘은 집중력 싸움을 벌이지 않는다.
아예 집중력을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승리하고 있었다.
2시간 경과
이제 아이들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화면 속 캐릭터가 무엇을 하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움직이고, 색이 바뀌고, 소리가 나면 그걸 본다. 이유는 없다.
단지 영상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계속 보고 있는 것이다.
이건 더 이상 ‘재미’가 아니다. 리듬이다. 한 번 타버리면 끊기 어려운 리듬.
지친 눈으로도 화면을 외면하지 못하는 리듬.
중요한 건, 이건 집중이 아니다.
아이의 집중력은 보통 15분도 채 유지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건 2시간째 계속되고 있다.
그건 집중이 아니라 정지다.
생각이 멈추고, 선택이 멈추고, 그저 반사적인 시선만 남는다.
그 순간, 나는 깨닫는다. 이건 실험이 아니다.
이건 학대다.
가상이라는 말이 위안이 되지 않는다.
화면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동자가 떠오르고, 그 안에서 무언가 꺼져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는 실험을 중단한다.
태블릿을 모두 꺼버리고, 조명을 켜고, 소리를 멈춘다.
아이들이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본다. 그제야 그들은 다시 ‘존재’하기 시작한다.
단지 가상 실험이었지만, 이 실험이 실제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미 현실에서 매일 반복되고 있다는 걸 나는 뼈저리게 깨닫는다.
10살 아이들은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애초에 이건 집중력의 실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건 구조적으로 불공정한 게임이다.
알고리즘은 쉬지 않는다.
피드백을 즉시 반영하고, 반응을 실시간으로 분석하며, 더 강한 자극을 점점 더 정확하게 제공한다.
아이들은 설계된 흐름 속에 점점 순응해 간다.
부모들은 안다. 이게 진짜 ‘노는 것’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 막기엔 너무 고되고, 피하기엔 너무 일상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잘 노는 것 같잖아.”
그건 믿음이라기보다 방어기제다.
불편한 진실 앞에서,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만들어주는 자기 위안.
하지만 아이는 점점 사라지고, 알고리즘만 남는다.
아이들이 조용한데 이유를 묻지 않고, 부모가 편한데 그 대가를 따지지 않으면, 그 순간 우리는 아이를 알고리즘에 넘기고 있는 것이다. 매일, 무의식 중에, 아무 의심 없이.
아이들은 아직 세상을 잘 모른다.
좋고 싫음의 기준도 흐릿하고, 선택과 통제의 감각도 아직 만들어지는 중이다.
반짝이는 화면, 빠른 소리, 과장된 표정 하나만으로도 쉽게 빨려든다.
아이들은 약하다. 그래서 쉽게 흔들리고, 쉽게 흡수된다.
어른들도 그걸 알고 있다.
특히 유튜브 같은 자극적인 화면 앞에서 아이들이 얼마나 무방비한지 매일 보고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도 한다.
“요즘 애들은 유튜브 너무 많이 봐요. 보다 보면 표정이 사라져요. 그냥 멍하니… 아무 생각도 없는 것처럼 보여요.”
사실 이 말속엔 약간의 우월감도 섞여 있다.
우리는 아니니까. 우리는 어른이니까.
끄고 싶으면 끌 수 있고, 필요할 땐 멈출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믿음이야말로 어른들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다.
알고도 끊지 못하는 것. 스스로 선택했다고 착각하는 것.
이미 알고리즘 안에 있으면서도, 밖에 있다고 믿는 것.
가령 이런 식이다.
집중 좀 해보겠다고 포모도로(생산성 향상과 집중력을 높이는 기법) 앱을 켜려고 폰을 들었다.
그런데 잠깐, 인스타 알림 하나 떠 있네.
그거 보고 나니 유튜브 추천 영상이 올라와 있다.
‘오랜만에 보는 영상인데?’ 하며 클릭.
보다 보니 커뮤니티 탭이 보이고, 아 맞다, 메시지 답장도 안 했지.
그러다 배고파져서 배달앱을 열고, 메뉴를 고르다 보니…
타이머는 아직도 켜지 못했다.
툭 건드리면 시작되고, 끌려다니는 사이에 한두 시간이 증발한다.
마음은 비어 있고, 손은 계속 스크롤하고, 눈은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하지만 아무 데도 닿지 않는다.
아이들은 유튜브 앞에서 무력해지고, 어른들은 모든 플랫폼 앞에서 스스로 항복한다.
기꺼이, 자발적으로, 피로조차 느끼지 않으면서.
그래서 다음 실험은 어른들을 대상으로 해볼까 생각 중이다.
장소는 거실, 조건은 자동 재생, 피실험자는 어른들.
사실 실험실은 필요 없다.
현실이 이미 최적화된 실험실이다.
소파 하나면 충분하고, 와이파이만 있으면 준비 완료.
실험복 대신 잠옷, 장비 대신 스마트폰이나 리모컨,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스스로 시작 버튼을 누르는 고도의 자발성.
플랫폼도 상관없다.
유튜브, 넷플릭스, 틱톡, 인스타그램, 쿠팡, 배달앱, 심지어 날씨앱까지 알고리즘은 내가 뭘 보게 될지, 내가 보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으니까.
실험자도 관찰자도 없다.
왜냐하면 이미 “한 편만 더”를 외치면 티브이 화면 속을 빨려 들어가 있을 테니까.
실험은 끝났고, 우리는 이미 그 결과 속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