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부장 vs 하루
새벽 5시. 알람이 울린다.
왼손이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찾아 헤맨다. ‘5분만 더…’ 속삭이며 다시 눈을 감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건 어제도 했고, 그제도 했고, 아마 내일도 그럴 것이다.
아무리 자도 피로는 쌓여 있고, 아무리 움직여도 일이 끝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나는 이 매일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 걸까?
멍한 아침 거울 앞에서 양치질을 하며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만약 누군가 “당신은 매일 싸우는 전투에서 100% 지게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면?
게다가 이 싸움엔 끝도 없고, 포상도 없으며, 관객도 없다면?
놀랍게도, 이 가상의 전투는 우리의 현실이다.
‘하루’라는 적과 매일 싸우지만 항상 지고 마는 인간의 이야기 그리고 나의 이야기다.
도대체 우리의 정 부장은 왜 그렇게 매일 지기만 하는 싸움을 반복하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정 부장을 하루라는 링 위에 올려두고, 지는 싸움의 의미를 실험해 보기로 한다.
경기장은 조용하고, 조명은 중앙만 비추고 있다.
심판은 없다. 관객도 없다. 오직 두 선수만이 이 무대 위에 있다.
한쪽은 늘 이기고, 다른 한쪽은 늘 진다.
홍코너, 하루!
나이 24시간, 패배 전적 0, 전 세계 공통의 챔피언.
무기는 시간, 침묵, 그리고 무자비한 반복성.
어제도 싸웠고, 내일도 싸울 그 상대.
숨도 차지 않고, 언제나 정확하고, 그리고 절대 지치지 않는다.
청코너 정 부장!
나이 50세, 반복 전적 18,250패, 그러나 오늘도 도전 중.
무기는 회피력이 떨어지는 책임감, 그리고 익숙한 절망에 대한 내성.
어깨는 시간을 짊어지고 굽었고, 배는 타협과 포기를 모르고 꾸준히 부풀렸다
땡. 땡. 땡. 금속성의 종소리가 어둠을 가르며 울린다.
유말년 캐스터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정 부장 vs 하루의 경기, 지금부터 생중계로 함께합니다! 저는 퇴직 전 마지막 중계에 진심인 현실 잔존형 캐스터 유말년입니다! 그리고 제 옆에는 묵직한 한숨으로 인생을 해설하다 해탈해 버린 이 허탈 해설자와 함께합니다.
이 허탈 해설자 : 네, 오늘도 삶의 의미를 묻는 경기… 허탈하지만 지켜보겠습니다.
유말년 캐스터 : 50년째 계속되는 이 고전의 대결! 현재 전적은 하루 선수의 압도적 우세입니다!”
이 허탈 해설자 : 네, 그렇습니다. 정 부장 선수는 지금까지 단 1승도 없이 무한 연패 중입니다. 하지만 이 경기가 특별한 이유는, 정 부장 선수가 오늘도… 질것이 확실시되기 때문이겠죠.
ROUND 1 – 오전 5:00
유말년 : 자, 말씀드린 순간 종이 울렸습니다! 경기 시작됐습니다!
정 부장 선수, 알람 울림과 동시에 몸을 움찔! 손을 뻗어… 알람을 꺼버렸습니다!
저건 좋지 않은 기술인데요? ‘5분만 더 스킬’을 초반부터 쓰는 정 부장 선수입니다.
매일 실패하지만 동일한 스킬을 사용하는 정 부장 선수의 대표 기술이죠.
이 허탈 : 이미 흐름은 하루 선수에게 넘어갔습니다. 기상 지연 시간, 3분 21초.
게다가 어물어물하는 순간 출근 시간이 빠듯합니다. 이렇게 되면 정 부장 선수 허둥지둥 스킬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딱히 누가 때리지 않아도 혼자 정신이 없어지는 스킬입니다.
ROUND 2 – 오전 5:40
유말년 : 정 부장 선수, 식탁에 앉았습니다. 아침 식사는 안 보이고 우유 한 잔, 영양제 몇 알, 그리고 침묵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아 그러나 역시. 침묵이 오래가지 않죠. 아내의 잽이 시작됩니다.
‘어제 빨래 개 놓으라고 했잖아.’ ‘애 학비 아직 안 냈어.’ 이건, 잔소리 콤보! 정확하게 급소만 때리는 기술입니다!
이 허탈 : 네, 이건 ‘정서 흔들기 콤보’로 분류됩니다. 짧고 간결하지만 반복성과 맥락의 누적이 핵심입니다. 정 부장 선수, 물 컵을 든 채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정신 줄을 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ROUND 3 – 오전 6:30
유말년 : 정 부장 선수 사무실에 가장 먼저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눈동자가 흔들리고, 아메리카노 커피 한잔로 정신을 붙잡으려 애쓰는 모습입니다.
오, 지금 보고 있는 파일, 아까 이미 한 번 봤던 자료인데요? 이걸 정 부장 선수 본인만 모릅니다!
이 허탈: 이건 ‘의미 희석 기술’의 전형이죠. 안타깝습니다.
게다가 8시 57분, 스마트폰에 ‘9:00 부서 회의’ 일정 알림 등장.
‘회의 리마인더 습격’, 이건 통증이 크지 않지만 정신적으로 상당한 타격입니다.
아 다행히 종이 울리고 3라운드가 끝이 납니다. 잠시 광고 보고 오시겠습니다.
코너석 : 코치 박 과장 등장
박 과장: 정 부장님! 물 한 잔 하시고요! 오늘은 보고서 제출 1건, 회의 두 개뿐이에요! 기세만 밀지 마세요!”
정 부장 : 알았어. 걱정 말라고... 헉, 헉, 헉
ROUND 4 – 오후 12:00
유말년 : 4라운드, 점심시간입니다. 햇살이 좋은 오후네요. 정 부장 선수, 잠깐 눈을 가늘게 뜨며 휴식을 즐기려는 순간! 하루 선수의 기습 어퍼컷! 들어옵니다!
이 허탈: 네 맞았습니다. 정 부장 선수의 휴대폰에 문자 알림음이 들리네요.
‘카드결제 금액 안내.’ 정 부장 선수 더 이상 가드를 올릴 기운조차 없어 보입니다. 충격이 커 보입니다.
멍하니 구름만 보고 있네요.
ROUND 5 – 오후 5:00
유말년 : 정 부장 선수, 보고서 마무리 후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이제 퇴근 시간이죠. 약간 숨을 고를 타이밍이죠? 아 그런데 하루 선수 틈을 주지 않고 갑작스러운 파상 공격이 시작됩니다. 하루 선수, 강력한 스트레이트!
스마트폰에 울리는 진동 다섯 번! 이사님의 카톡! 이건 카톡 폭격입니다!
이 허탈 : 정 부장 선수, 다리가 휘청합니다. 다시 책상에 주저앉고 마네요.
한 손은 가방을 들고 있고, 다른 손은 머리를 감쌉니다.
‘퇴근 실패 정신 붕괴 기술’입니다. 오늘 하루의 무게가 카톡 진동 하나에 묵직하게 실려오네요.
ROUND 6 – 오후 8:00
유말년 : 자 경기가 이제 막바지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아내의 잔소리 잽이 가볍게 안면 부위를 타격해 옵니다. 정 부장 선수 가드를 올리며 침묵으로 잘 방어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여전히 게임 중이고 선수들 사이에 침묵이 그나마 숨을 돌리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정 부장 선수 이 틈을 노려 조용히 나와 산책길에 오릅니다.
하루 선수도 약간 지쳐 보이네요. 이번 라운드에서는 쉬어가는 분위기입니다.
정 부장 선수에겐 유일한 회복 타이밍이 될 수 있습니다.
이 허탈: 반려견이 말이 없다는 건, 곧 치유입니다. 정 부장 선수, 눈을 감고 천천히 걷습니다.
이건 ‘침묵 회복 구간’, 오늘 처음으로 체력 회복 수치 상승이 감지됩니다.
유말년 : 아 그런데 저건 뭔가요? 정 부장 선수 매우 당황하는 모습입니다. 산책 길에서 개똥을 밟고 마는군요. 아 충격이 크진 않지만 매우 허탈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FINAL ROUND – 오후 11:00
유말년 : 자, 이제 마지막 라운드입니다. 정 부장 선수, 방의 불을 끕니다.
몰래 휴대폰을 꺼내 주가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아... 이게 뭔가요? 주가가 시원하게 내려가고 있습니다. 폭포수 같이 내려갑니다.
이 허탈 : 이건 하루 선수의 피니시 블로우입니다. 떨어지는 그래프 하나로 오늘을 마무리하죠.
정 부장 선수, 손절할지 존버할지 고민하며 눈을 감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말년 : 하지만, 잠깐만요. 지금… 네, 정 부장 선수, 아주 작게 고개를 젓습니다.
방금 그 차트 앞에서, 조용히 ‘아니’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게 오늘 하루의 전부는 아니야.’라는 뜻일 겁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알람을 확인합니다. 내일 출전을 위한 준비를 마칩니다.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내쉽니다.
자, 이렇게 오늘의 경기는 종료됩니다.
이겼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분명히 쓰러지진 않았습니다.
내일 아침, 또다시 링 위에서 정부장의 도전을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루라는 놈은 인정 사정없이 냉정한 녀석이다.
쉬지 않고 흐르고, 지치지도 않고, 우리를 결코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내가 늦게 일어나든, 멍하게 있든, 기분이 좋든 나쁘든 하루는 지나간다.
결과적으로 하루는 항상 우리보다 빠르다.
그리고 항상 먼저 끝난다.
우리는 매일 똑같은 전투를 벌인다.
일어나고, 씻고, 무언가 하고, 지치고, 눕는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정답은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싸움은 이기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나로 버티기 위한 것’이다.
패배가 정해졌어도 우리가 계속 싸우기로 한 건, 그 자체가 삶이기 때문이다.
결국 싸움의 대상은 ‘시간’이 아니라 시간 안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했는가이다.
밥을 제대로 먹었는지, 누군가의 얼굴을 자세히 봤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뭘 참아냈는지...
어쩌면 하루는 정 부장이라는 우리가 우리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임시 무대일지도 모른다.
비좁고 지저분하지만, 거기서 선택하고 버텨야만 내일이 생긴다.
정 부장 VS 하루
그는 단 한 번도 하루를 이긴 적이 없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싸움을 거른 적도 없다.
지는 걸 알면서도 다시 일어나고, 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맞선다.
누군가는 묻는다.
그게 무슨 의미냐고, 그걸 왜 하느냐고.
그러나 삶이란 애초에 이기기 위해 하는 싸움이 아니다.
흔들리더라도 버티겠다는 결심, 그 자체가 삶이다.
결국 싸움의 대상은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 속에서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견뎠고, 무엇을 포기하지 않았는가.
그게 삶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내일도 또 싸울 것이다. 지는 줄 알면서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매번 지는 사람이 아니라, 매번 살아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