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vs 바퀴벌레 수만 마리
모든 건 바퀴벌레 한 마리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새벽 두 시, 자다 깼다.
목이 말라서 냉장고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거실 바닥을 태연하게 가로지르던 한 마리의 바퀴벌레.
나는 분명히 그걸 보았고, 소름이 돋았지만 잡으려 했다.
물론 실패했다.
그리고 그 순간 생각했다.
"바퀴벌레 한 마리만 봐도 소름이 돋는데, 만약, 수천, 수만 마리가 달려들면 어떨까?"
그때였다.
머릿속에서 아주 진지한 시뮬레이션이 시작되었다.
수만 마리의 바퀴벌레 vs 집채만 한 덩치의 괴물 한 마리.
말도 안 되는 설정이지만, 이상하게 끌렸다.
왜냐하면 우리는 흔히 크고 거대한 것에 집중하지만, 진짜로 멘탈을 무너뜨리는 건 대개 작지만 다수의 집단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나가 아니라 많음이, 강함보다 집요함이 더 무섭다는 진실.
그래서 나는 가상의 전장을 마련했다.
괴물과 바퀴벌레를 불러냈고, 아무도 요청하지 않은 실험을 시작했다.
머릿속 한복판에서. 모두가 잠든 그 시간에...
본 내용에는 상상 이상으로 큰 괴물과, 상상 이상으로 많은 바퀴벌레가 등장합니다.
일부 장면은 간지러움, 혐오감, 이유 없는 피부 긁기, 존재하지 않는 소리의 환청 등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임산부, 벌레 알레르기가 있으신 분, 혹은 "그냥 바퀴벌레는 무조건 싫다."는 분들께는 심리적 불쾌감이 발생할 수 있으니 읽기 및 상상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전투를 준비하자.
장소는 평지. 탁 트인 공터. 도망도, 숨어들 곳도 없다.
괴물은 헐크를 모델로 삼았다.
키는 약 12m. 건물 2층 높이. 두꺼운 피부, 근육질 팔, 강철 같은 발톱.
분노 상태로 모든 걸 찢고 부술 수 있지만, 반사신경은 인간 수준.
바퀴벌레는 총 50,000마리. 다들 아시다시피 갈색의 윤기가 흐르는 몸체와 날개 보유.
크기 3~5cm, 구멍을 보면 어디든 기어들어가고, 따뜻한 곳을 좋아한다.
말 그대로 사방에서 동시에, 본능적으로 들이닥친다.
전투 시작 30초
괴물은 으르렁거리며 바퀴벌레 떼를 향해 달려든다.
발을 한번 구르면 수백 마리가 짓밟히고, 날갯짓이 산산조각 난다.
좋다. 지금까진 괴물의 압승이다. 속이 시원할 정도다.
하지만, 시작은 언제나 이렇게 단순하다.
60초 경과
바퀴벌레는 죽어나가면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차라리 더 가까이 달라붙는다.
괴물의 발가락 사이, 다리 관절 틈, 겨드랑이 아래쪽에서 하나둘씩 몸으로 들어간다.
괴물은 처음엔 간지러운 듯 반응하지만, 이내 움직임이 어색해진다.
5분 경과
바퀴벌레 떼는 이제 ‘들러붙는다’ 수준이 아니다.
기어들어간다. 귀 속으로, 콧속으로, 목 뒤로, 심지어 입안으로.
괴물은 포효하지만 그 포효는 '쿨럭쿨럭' 기침으로 바뀐다.
기침은 곧 구토로, 구토는 질식으로.
바퀴벌레는 혓바닥 아래에서 꿈틀거리고, 이 와중에 잇몸 사이에 알까지 낳는다.
괴물은 이제 더 이상 적을 보지 못한다.
눈꺼풀 뒤로 바퀴벌레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10분 경과
괴물은 아직 살아 있지만, 움직이지 못한다.
무엇이 파고들고 있다는 아련한 느낌만 있다.
하지만 그 안에 남아 있는 것이 살아 있는 자신인지, 기어다니는 바퀴벌레인지 분간할 수 없다.
감각은 흐려졌고, 몸은 낯선 것들에 점령당한 영토처럼 조용히 떨리고 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어디까지 자신인지조차 알 수 없다.
공포는 방향이 없고, 그래서 더 깊이 스며든다.
15분 경과
괴물은 마침내 주저앉았다.
한때 모든 것을 부술 것 같았던 팔은 무릎을 감싸고, 그 거대한 몸은 수축된 채 땅에 붙어 떨고 있다.
숨은 가쁘고, 눈은 흐리다.
괴물은 난폭한 저항은 끝났고, 명령도 멈췄다.
그는 더 이상 싸우는 존재가 아니다. 단지 버티고 있는 육체일 뿐이다.
그 등 위로, 어깨 위로, 목덜미 아래로 바퀴벌레들이 기어오른다.
수천 마리가, 방향도 없이, 침묵 속에서 천천히, 이제 이 몸을 차지하듯 흩어지고 퍼진다.
바퀴벌레들은 무기도 없고, 말도 없지만 멈추지 않는다.
포효는 사라졌다.
오직 숨소리만, 그리고 질서 없이 움직이는 다리 소리만이 남았다.
거대한 시스템은 말 없는 연대의 파도 앞에서 조용히 주저앉았다.
덩치는 무력했다.
거대한 힘은 끝없이 기어드는 생의 본능 앞에서 조용히, 그러나 완전히 패배했다.
이렇게 전투는 15분만에 끝났다.
괴물은 단순한 물리적 힘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의 권력이었고, 하나의 시스템이었고, 말 없는 다수를 침묵시키는 질서였다.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모든 것을 삼킬 듯 다가오던 질서.
우리는 그런 것을 보면 본능적으로 움츠러든다.
왜냐하면 그는 거대했고, 명확했고, 무엇보다 복종을 요구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두려움은 늘 보이는 것에 향한다.
하지만 바퀴벌레는, 보이지 않는 현실이다.
하나쯤은 무시된다. 열쯤은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천, 만의 방향 없는 움직임은 어떤 질서도, 어떤 권위도 무력하게 만든다.
괴물은 무너지지 않았다. 잠식당한 것이다.
겉은 멀쩡했지만, 그 몸속을 파고든 수많은 의지가 그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렸다.
그들은 이름도, 깃발도, 무기도 없었다.
다만 같은 쪽을 향해 틈으로, 균열로, 열렬히 침투했을 뿐이다.
무시당했던 것들이, 세상을 뒤집었다.
부수지 않아도 무너뜨릴 수 있다.
기억조차 남기지 않고서.
그리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때 거기, 아주 작은 것들이 있었다.
불의에 맞선 작은 불복종, 서로를 놓치지 않는 끈질긴 연대, 지치지 않는 저항의 발걸음, 거짓을 향한 멈추지 않는 질문, 그리고 잊지 않으려는 기억의 나눔.
권력은 외부의 무력 앞에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허물어뜨리는 건 바로 이런 작고 끈질긴 움직임들이다.
거대한 균열은 언제나, 눈에 띄지 않는 반복에서 시작된다.
작고 미미하지만, 지워지지 않고, 조율되지 않으며, 언제든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독선적인 시스템을 흔드는 건 무엇인가?
거대한 적 하나인가? 아니면
끝없이 되살아나는, 작고 날카로운 예외들인가?
이 가상 실험의 결론은 명확하다.
괴물은 힘으로 세상을 위협한다. 하지만 힘은 예측 가능하고, 그래서 대응 가능하다.
바퀴벌레는 다르다.
의도도 없고, 명령도 없고, 논리도 대화도 통하지 않는다.
그저 파고들 뿐이다.
괴물은 무섭지만, 세상을 진짜로 바꾸는 건 작고 많고, 끈질긴 존재들이다.
괴물은 쓰러지고, 바퀴벌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흩어진다.
흔적도, 설명도 없이.
진짜 공포는 ‘크기’가 아니라 ‘지속’에 있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건, 부조리 앞에서 침묵하지 않으려는 다수의 의지다.
권력은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을 무너뜨리는 건, 부조리에 침묵하지 않으려는 다수의 의지다.
※ 이 괴물과 바퀴벌레에 대한 가상 실험의 내용은 작가의 머릿속에서만 발생한 것이며,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문제는 상상이 현실보다 오래 남는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