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감정이 냄새처럼 퍼진다면

기분이 향기로 배달되는 세상

by 한자루


금요일 저녁 6시 48분. 퇴근 후 아파트 엘리베이터.
혼자였다. 완벽했다. 그 순간은 오직 나만을 위한 소우주였다.

나는 등허리를 벽에 살짝 기대고, 바지를 아주 미세하게 조정했다.

그리고 살짝, 아주 작게, 조절된 양으로 방귀를 뀌었다.

소리 없이, 매끄럽게, 예의 바르게. 소리도 없었고, 내 발밑 쪽으로 자연스럽게 분산될 거라 믿었다.

그런데... 그 냄새가 의외로 꽤 ‘강직한’ 성격이었다.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고, 생각보다 빠르게 퍼졌다.
‘자취를 감출 시간’조차 주지 않고 9층에서 문이 열렸다.

올라탄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게 인사 대신 “후각적 의심”을 보냈다.
콧잔등이 살짝 찌푸려지고, 그 눈빛은 분명 말했다.
“분명, 이 엘리베이터 안에 뭔가 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도 아무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모든 정보는 이미 교환되었다. 그때, 번개처럼 스친 생각 하나.

“방귀 냄새는, 얼굴 표정보다 정확하다.”

그리고 이어진, 더 엉뚱한 상상. 만약 기분도 냄새로 퍼진다면 어떨까?

말보다 먼저 감정이 퍼지는 세상. 기분이 향기로 배달되는 시대.

그날,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깨달았다.

방귀 하나가 모든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면, 감정 그 자체도 ‘기분의 가스’처럼 퍼질 수 있지 않을까?

말로 속일 수는 있어도, 냄새는 못 속인다.

그렇게 나는 28층 도착 전, 머릿속에 한 편의 상상을 다 썼다.
그 상상의 이름은, “기분이 향기로 배달되는 세상.”


실험개요

1. 실험명 : 기분이 향기로 배달되는 세상
2. 실험 배경 : 사람의 기분이 더 이상 표정이나 말로 전달되지 않고, 향기(냄새)로 전달되는 세상
3. 전제 조건 :
1) 감정이 생기면 그에 맞는 고유의 향기가 발생한다.
2) 그 향기는 반경 2미터 내 사람들에게 명확히 전달된다.
3) 향기는 억제할 수 없으며, 감정이 사라져야 사라진다.
4) 표정이나 말투로 속일 수 없다. 향기가 ‘진심’을 먼저 말해버린다.4,.
피실험자 정보 : 본인 / 50대 초반 / 평범한 회사원 / 배 나옴. 방귀 빈도 높음. 후각 민감


실험 1 : 회의실에서 퍼진 수치심의 향기

시간: 화요일 오전 9시 41분
장소: 사무실 회의실
상황: 정기 주간회의, 슬라이드 발표 중

프로젝터가 켜지고, 회의실 조명이 절반쯤 꺼졌다.
정부장은 왼손에 리모컨을, 오른손에 땀이 밴 A4용지를 들고 서 있었다.
그의 숨은 들키지 않게 천천히, 그러나 상당히 고통스럽게 올라왔다.
“보고 드리겠습니다…”
첫 슬라이드가 떴다. 하지만 3초 뒤, 문제가 발생했다.

두 번째 슬라이드가 로딩되지 않는다.
모니터는 깜빡였고, 마우스 커서는 모래시계로 변했다.
정부장은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백했지만, 그의 냄새는 아니었다.

회의실 공기 속에서 무언가가 퍼지기 시작했다. 묘하게 눅눅하고, 익숙하면서도 께름칙한 냄새.
딱, '식은 라면국물에 땀 밴 와이셔츠' 냄새였다.

누구도 그 냄새의 정체를 말하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그 냄새가 정부장의 내면에서 발생한 감정적 생체 반응이라는 걸 모를 수 없었다.

그는 슬쩍 말린 입술을 축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게 원래… PDF인데, 어제 저장이 잘 안 됐던 것 같고요…”
하지만 설명이 길어수록 수치심 향은 점점 진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냄새가 땀이랑 싸우기 시작했다.

셔츠 목깃 근처에서 두 냄새가 화해 없이 엉겼다. 회의실은 말없이 정숙했다.

그 누구도 비웃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약간씩 숨을 덜 들이마셨다.
특히 가장 가까이 앉은 후배가 콧속 필터링 기능을 일시적으로 가동 중단한 표정을 지었다.

슬라이드는 결국 안 넘어갔고, 정부장은 마지막 장면으로 넘어가듯 말했다.
“…아무튼 그렇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의 손은 마우스를 쥔 채 미세하게 떨렸고, 향기는 마치 “고생했어요”라고 말하듯 끝에 잦아들었다.


그날 회의에서 나는 실수를 해버렸다.
하지만 실수보다 먼저 방 안을 채운 건 나의 수치심이었다.

말보다 빠르게, 얼굴보다 정직하게 퍼진 감정의 향기.

사람은 어쩌면 향기로 말하고, 향기로 이해받는지도 모른다.
수치심이란 건 꼭 누가 비웃어서 생기는 게 아니다.

그냥 내가 나를 창피해할 때 그 냄새는, 말없이 방 안을 채운다.

그리고 그 냄새는 가끔, 누군가가 웃지 않고 같이 고개를 숙이는 방식으로 사라진다.


실험 2 : 아내의 냄새 없는 분노

시간: 토요일 오후 5시 27분
장소: 거실
상황: 분명 뭔가 잘못했다. 하지만 아직 그게 뭔지 모른다.


토요일 오후 5시 27분. 정부장은 거실에 앉아 있었다.
TV는 켜져 있었지만, 정부장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분위기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아내가 조용했다. 거실을 지나가며 방향을 트는 각도부터가 다소 날카로웠다.
냉장고 문을 여는 손이 부드러운데 묘하게 짧았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건 이 실험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감정이 향기로 표현되는 세상인데, 아내는 지금 아무 냄새도 풍기지 않았다.

정부장은 긴장했다. 분노라면 차라리 가스불 켜는 냄새, 뜨거운 주전자 냄새라도 나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공기 자체가 멈춰 있었다. 냄새가 없는 감정은, 가장 농축된 감정이다.

정부장은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뭘 잘못했지? 설거지는 했고, 분리수거도 했고, 침대에 양말 벗어놓은 건 어제 일이었고…혹시… 치킨?"

순간, 치킨 상자가 떠올랐다. 어젯밤에 혼자 몰래 치킨을 시켜 먹고, 냉장고 맨 위에 남은 다리 한개를 숨겨뒀다.

정부장의 뇌는 순간적으로 치킨 위치를 스캔했고, 아내가 방금 그 문을 열었을 가능성이 87%라고 계산했다.
그리고 냄새가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정부장은 천천히 입을 열어 자수했다.

“혹시… 냉장고에 치킨 봤어? 아 그거 말이야. 어제 너무 치킨 생각이 간절해서 말이지...”

아내는 대답 대신 방을 나가며 아주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그 순간, 약한 바람이 들어왔고, 그 안에 미세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 냄새도 아니었다.
그냥 ‘이제 말 안 하겠다’는 냄새였다.


사람은 향기로 감정을 표현한다. 하지만 아내는 그 향조차 꺼버릴 수 있다.
그건 분노의 냄새가 아니라, 단절의 냄새다. 말을 하지 않겠다는 말, 냄새조차 안 내겠다는 감정.

진짜 무서운 감정은 코로도, 귀로도 못 느낀다.
그건 몸으로 오는 것. 눈치로만 알아야 하는 것.

그날 정부장은 깨달았다.
감정이 냄새로 퍼지는 세상에서는, 냄새가 없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것을.


실험 3 : 토요일 아침, 아들의 귤껍질 향기

시간: 토요일 오전 9시 11분
장소: 집, 거실
상황: 늦잠 자다 일어난 아버지 vs 활기찬 아들


토요일 아침.
정부장은 소파에 절반쯤 기댄 채, 목을 뒤로 꺾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중이었다.

몸이 무거웠다.
전날 회식 자리에서 괜히 ‘해물탕’ 같은 걸 시킨 게 화근이었다.
새벽 1시쯤 돌아와 양말도 안 벗고 누웠고, 지금은 머리카락에서 국물 냄새 비슷한 게 은은히 배어 나오는 상황.

그런데 그때 옆에서 ‘툭’ 하고 귤 껍질이 까지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방 안을 부드럽게 감싸는 상큼한 향. 귤껍질과 햇살이 마른 수건이 결혼한 듯한 냄새.

정부장은 본능적으로 코를 킁킁댔다.
입은 여전히 다물고 있었지만, 후각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아빠 이거 까줄까?”
아들의 목소리. 초등학교 4학년. 머리는 헝클어져있고, 파자마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그 작은 손에 들려 있는 건 조막만한 귤 한 알.

“아니… 됐어. 아빠 좀만 더 누울게…”

그렇게 말했지만, 아들은 귤을 까서, 껍질 한 조각을 내 코 앞에 들이밀었다.
향이 세졌다. 그건 말이 아니었고, 무언의 심폐소생술이었다.

방 안은 어느새 완전히 귤 향으로 채워졌다.
정부장의 뇌는 여전히 덜 깬 상태였지만, 몸은 ‘행복 수신 완료’ 상태로 들어갔다.

아들은 깔깔 웃으며 귤을 먹었다.

그리고 웃음이 터질 때마다, 공기 중에 작은 감정 입자들이 터지는 것 같았다.

그건 향기였다. 아무 말보다 먼저 전해지는 감정의 신호.
아빠, 나 지금 행복해요. 그 향기가 말하고 있었다.


그날 정부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들의 귤 한 알에 완전히 녹아버렸다.

행복은 입으로 전하는 게 아니라, 코로 먼저 들어와 마음을 흔든다.

그건 귤 껍질 향일 수도 있고, 아들의 웃음일 수도 있고, 토요일 오전의 햇살일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감정은 전염된다. 특히, 기쁨은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퍼진다.
귤 향처럼. 그리고 귤 껍질처럼, 작은 한 조각만 있어도 방 하나를 다 채울 수 있다.


실험 4 : 혼잣말하다 퍼진 ‘울컥 냄새’

시간 : 일요일 오후 2시 33분
장소 : 서재 책상 앞
상황 : 책상 정리 중, 오래된 사진 한 장 발견


일요일 오후. 정부장은 책상 서랍을 정리 중이었다.
언제 정리하려고 마음만 먹고 미뤄온 서랍. ‘언젠가 쓰려고 모아둔’ 펜들, 꺼내지도 않은 회사 수첩들, 버리기엔 애매한 영수증들 사이에서 한 장의 종이가 나왔다.

크레파스로 그린, 아주 단순한 그림. 해가 떠있고, 나무 옆에 웃고 있는 두 사람.
그리고 아래에 삐뚤삐뚤한 글씨.

“아빠랑 나, 놀이터 갔다 왔어요.”
정부장은 그 종이를 조용히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거 아직 있었네.”

그 목소리는 낮았고, 숨과 섞인 말이었다.
그 순간, 방 안 공기에서 향이 번졌다. 말로 설명하긴 어렵다.

젖은 마룻바닥, 약간 눅눅한 이불 냄새, 오래된 사진첩을 꺼낼 때 나는 종이 냄새.

그건 슬픔이라기엔 따뜻했고, 기쁨이라기엔 아릿했다.
그건 ‘울컥’의 냄새였다.

감정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고, 방 안은 그 냄새로 조용히 가득 찼다.

정부장은 종이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한 번 더 들여다봤다. 그리고 작게 한 마디 더 흘렸다.

“아. 이럴 때가 있었지.”

그 말이 끝나자, 냄새가 더 진해졌다.
지금은 없어도, 어떤 감정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퍼졌다.


사람은 웃으면서도 울컥할 수 있다. 말은 안 해도, 마음은 흔들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 감정은 향기로 새어 나온다.

혼잣말이 나오는 순간, 감정은 이미 방 안에 퍼져 있다.
울컥은 소리가 아니라, 냄새다. 그냥 그 사람 옆에 앉아 있으면, 알 수 있다.
지금 이 사람이, 무너지기 직전이라는 걸.

그날 정부장은 말 대신 코로 울었고, 그 감정은 방 안에 아주 오래, 머물렀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말을 고르며 살아간다.
'이건 오해받을 수 있으니', '괜히 분위기 흐릴까 봐',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니까'…

하지만 감정이 향기로 퍼지는 세상에선 그 모든 고민이 무용지물이다.

기분은 숨길 수 없었고, 마음은 코로 먼저 도착했다.

기쁘면 향기로 방이 밝아졌고, 화나면 말 없이 공기가 무거워졌고, 슬프면 물기 섞인 냄새가 벽지에 스며들었다.
무기력은 오래되고, 사랑은 오래 남았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감정은 언젠가 말로 옮겨지겠지 하는 그 미루는 마음이 사실은 가장 많은 걸 놓치고 있었다는 걸.

아내의 침묵에서 퍼지지 않은 냄새, 아들의 귤껍질 향기, 회의실에서 내뿜은 식은 라면국물, 혼잣말 속에서 피어난 울컥 냄새.

그 모든 순간은 말 없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우리가 잘 웃지 않아도, 잘 말하지 않아도, 서툴러도 괜찮았던 이유는 감정이 향기로, 진심이 숨결로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만약 정말, 그런 세상이 온다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말로는 몰랐던 것들이, 냄새로는 전해질 수 있으니까.

진심이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한다면, 그게 어떤 방식이든, 그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가장 솔직한 대화일 테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내 곁에 있는 누군가가 향기 없이도 내 마음을 알아줄지도 모르니까.

그걸 믿으며, 나는 오늘도 숨을 쉬고, 그저 조용히 살아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향기가 실린 공기 같은 무언가가 흐른다.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고, 잡히지 않지만 가슴에 남는다.
그건 기분이기도 하고, 말 못 한 진심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것을 숨처럼 들이마시며, 서로를 오해하거나 이해하면서
결국, 함께 숨 쉬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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