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시간이 없다는 당신에게 드리는, 무모한 상상
우리 대부분은 “시간이 없어서 못 했어요.” 그런 말을 하루에 최소 한 번은 한다.
운동 못한 것도, 책을 안 읽은 것도, 다이어트가 내일부터인 것도, 심지어 부모님께 전화 한 통 못 드린 것도 다 그놈의 “시간 부족” 탓이다.
나는 늘 바빴다.
출근하랴, 회의하랴, 컴퓨터 붙잡고 씨름하랴, 아이 숙제 봐주랴, 와이프 말 들어주랴 (들었지만 기억은 안 나지만).
그러던 어느 날 밤 10시 42분.
나는 아들의 책상 앞에 앉아, 비율도 안 맞는 의자에 궁둥이 반만 걸치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눈은 풀리고, 뇌는 오프라인.
마우스를 누른 채 꾸벅 졸다가 내 손가락이 엑셀 셀 안에서 ‘sdfklsejfwej’ 같은 언어를 만들어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머릿속을 쿵 치는 생각이 들었다.
“아, 하루가 48시간이면 좀 더 여유롭게 살 수 있을 텐데...”
하루라는 시간이 두배로 늘어나면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거 아닌가?
지금보다 두 배의 시간. 두 배의 가능성. 두 배의 인생. 심지어… 두 번 점심 먹을 수 있다?
완벽했다.
그래서 나는 또 하나의 엉뚱한 상상 실험을 시작했다.
만약 하루가 48시간이면, 우리는 정말 ‘시간이 없어서 못 했던 일’을 다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피곤함만 2배가 될까?
실험개요
실험 조건 : 지구의 자전 속도 감소 (하루 = 48시간)
수면은 6~8시간 유지
출근도 2번, 퇴근도 2번
인간들은 "시간 부족"이란 말을 할 수 없음
실험 대상 : 본인(만성 피로형 인간), 가족 3인, 회사 구성원
관찰 목표 : 시간이 늘어났을 때 인간의 우선순위, 욕망, 관계는 어떻게 변하는가?
지구의 자전 속도가 절반으로 느려졌다. (왜 그런지는 묻지 마시라. 과학은 이미 이 상상에서 퇴장했다.)
이제 지구는 48시간에 한 바퀴 돈다. 해는 24시간 동안 하늘에 떠 있고, 그다음 24시간은 밤이다.
하루가 낮 24시간 + 밤 24시간으로 구성된, 진짜 ‘48시간짜리 하루’가 된 것이다.
물론 인류는 당황했지만 곧 적응했다.
신기하게도 인간은 환경이 바뀌면 버티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 사람들은 48시간 안에 두 번의 수면과 두 번의 활동 사이클을 가지게 되었고, 정부는 ‘1일 2 교대제’를 공식 도입했다.
회사, 학교, 병원, 편의점, 택배사, 유튜버까지 모두 이 새로운 시간 체계에 맞춰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 48시간짜리 하루가 열린 것이다.
48시간짜리 하루의 첫 출근.
태양은 아침 7시에 뜬 이후로 10시간이 지나도, 14시간이 지나도, 아직도 하늘 꼭대기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땀은 안 나는데 짜증이 났다.
‘오후 9시’인데 아직도 대낮인 이 세상에, 나는 첫 번째 근무 8시간을 끝냈다.
퇴근은 잠시였다. 씻고, 밥 먹고, 눈 붙이려다 보니 벌써 두 번째 출근 시간.
회사가 정한 공식 근무시간은 1부 8시간 + 2부 8시간 = 총 16시간.
그런데 정말 묘한 게 있었다. 16시간을 일했는데도 밖은 여전히 낮이었다.
날은 안 저물고, 몸만 저물었다. 사무실 창밖은 새파랗고, 형광등은 하얗고, 내 정신은 누렇게 바랬다.
예전이라면 밤 10시가 넘었을 시간, 2부 회의실에 앉아 있는 우리는 마치 하루 2교대 시스템에 갇힌 실험쥐 같았다.
물리적 햇빛은 끝없이 쏟아졌지만, 우리가 앉아 있는 곳은 그 어떤 밤보다 어두웠다.
프레젠테이션 화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48시간 체제, 생산성 2배 향상 계획'
그 문장을 보고 있자니, 이건 ‘계획’이 아니라 사형 집행 순서표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피곤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일하면 돈이 나오니까요.”
“야근 수당이 두 번 들어오잖아요.”
“이제 집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말들엔 익숙한 향이 배어 있었다.
자본주의에서 희망은 언제나 통장에 있다. 그게 비어 있단 걸 깨달을 때까지는.
점점 실감이 났다. 시간이 늘어난 게 아니라, 인간의 노동 시간만 늘어난 거라는 걸.
자연은 인간에게 선물처럼 시간을 늘려줬지만, 우리는 그걸 보고서 제출, 실적 압박, 온라인 회의, KPI로 환전해 버렸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오며,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현실적인 시를 읊었다.
"일은 늘고, 나는 줄고, 낮은 계속되는데, 나는 끝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안에서 아주 조용한 결론이 내려졌다.
“우리는 시간이 없었던 게 아니다. 탐욕이 먼저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늘어난 시간은 기회가 아니라, 자본주의에게 더 많은 칼날을 쥐여준 셈이었다.
2부 퇴근 후, 집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7시. 문을 열자, 집 안도 여전히 낮이었다.
하늘엔 해가 여전히 떠 있었고, 커튼 너머로 쏟아지는 햇빛은 이 집도 야근 중이란 걸 알려주고 있었다.
거실에선 아들이 숙제를 하고 있었다. 두 번째 숙제였다.
“아빠, 학교에서 오늘 숙제 2개 줬어요. 1 부용이랑 2 부용!”
어디서 웃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 순간 부엌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집에 왔어? 그럼 잠깐 씻고, 2부 일정 같이 확인하자.”
“… 우리 가족에도 시프트가 생긴 거야?”
“그럼. 가족도 이제 1부 2부 교대지.
아침엔 등교 준비하고, 오후엔 학원 셔틀 돌고, 새벽엔 애 숙제 검사하고, 낮엔 빨래 두 번 널어야 돼.”
그 말투가 무섭게 담백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랬다는 듯이.
밥상에 마주 앉았지만 대화는 없었다.
우리 각자는 두 번째 식사를 하느라 포크질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는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 결국 물이나 한 모금 마셨다.
24시간 내내 해가 떠 있으니, 식사도, 대화도, 쉼도, 다 ‘대충’ 하고 넘어가게 됐다.
시간은 늘었는데, 우리 사이엔 말이 줄었다. 아들이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아빠, 나 오늘 아빠 얼굴 두 번 봤어. 근데 한 번도 얘기 안 했어.”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48시간짜리 하루가 생기면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함께 있는 시간’만 늘었지, ‘서로에게 쓰는 시간’은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줄었다.
이 집에 함께 사는 세 사람은 서로 다른 시간표를 들고 같은 공간에서 각자 버티고 있었다.
그때 나는 문득 이런 상상을 해봤다.
“이대로 가면, 우리는 같은 집에서 24시간을 살아도 서로를 ‘모르는 사람’처럼 살게 되지 않을까?”
아내는 다시 말한다.
“자, 이제 2부 낮잠 시간이니까 얼른 씻고 누워. 3시간 자고, 오후 스케줄 봐야지.”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햇살 가득한 침실로 들어갔다.
해가 지지 않는 낮, 아내와 아이는 여전히 깨어 있고 나는 이불을 덮은 채 눈을 감았다.
그 안에, 쉼은 없고 피로만 남아 있었다.
시간이 늘면 가족과 더 가까워질 줄 알았다. 하지만 결국 관계란, 시간의 길이보다 그 시간 안에 무엇이 오가는가에 달려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결국 ‘깊이’가 없으면 ‘곁’은 소용이 없었다.
48시간 중 후반부 24시간은 밤이다. 정확히는, 길고도 길고도 긴 밤이다.
태양은 저녁 7시에 고개를 숙이고, 그다음 24시간 동안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
처음 이 밤을 맞이한 날,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오히려 잘 됐다. 밤 시간엔 쉴 수 있겠지.”
그 착각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지는 밤 17시간째에 알아차렸다.
초저녁엔 사람들 모두 분주했다.
야간 회의, 야간 운동, 야간 공부, 심지어 새로 생긴 ‘야간 셀프개발센터’는 밤 10시~새벽 5시가 프라임 타임이었다.
SNS엔 이런 글이 넘쳤다.
“조용한 밤, 나를 완성하는 시간”, “어두울수록 별이 빛나는 법 #2부 자기 계발”
스크롤을 내리다 나는 깨달았다. 이젠 밤조차 소비되고 있다는 걸.
고요함은 상품이 되었고, 침묵은 효율로 가공되었다.
밤 12시. 밖은 어두웠지만 도시의 불빛은 여전했다.
창밖을 보니 편의점, 헬스장, 24시간 북카페, 심지어 아이돌 콘서트까지 ‘2부 한정 라이브’ 중이었다.
한밤중의 열기는 마치, 이 도시가 절대로 자신과 마주하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밤 17시간째. 무릎에 노트북을 얹은 채 멍하니 앉아 있다가, 거울을 봤다.
눈은 멀쩡히 떠 있는데, 그 안에 아무 표정도 없었다. 이건 피곤함이 아니었다.
내가 나에게 낯설어진 순간이었다.
그때 머릿속에 한 문장이 떠올랐다.
“낮에는 해야 할 일이 날 가려주고, 밤에는 그 가림막이 사라진다.”
밝을 땐 몰랐던 감정들이,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피로, 외로움, 허무,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불안.
나는 잠을 자려 누웠지만, 밤이 너무 길었다. 10분 후 다시 눈을 떴다.
창밖엔 다른 집 거실 불빛이 켜져 있었다. 누군가 그곳에서도 잠들지 못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 도시 전체가 잠 못 이루는 거대한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낮에는 일과 할 일과 만남이 날 가려주지만, 밤이 되면 나는 내 존재가 그대로 드러나는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긴 밤은 쉬는 시간이 아니라, 도망칠 수 없는 자아의 반사경이었다.
빛이 꺼졌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게 있다. 바로 삶의 방향, 그리고 그 안에 비어 있는 나 자신.
하루가 48시간으로 늘어난 지 어느덧 10일째.
사람들은 놀랍도록 빠르게 새로운 세계에 적응했다.
그리고 더 놀랍도록 빠르게 그 시간을 ‘무언가’로 채워 넣기 시작했다.
이제 아침엔 출근하고, 오후엔 투잡을 하고, 밤엔 콘텐츠를 만들고, 새벽엔 명상을 한다.
“시간이 많아지면 여유를 즐기고 싶다”라고 했던 이들은 막상 시간이 생기자 이렇게 외쳤다.
“이걸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그들은 곧 자기 계발 일정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1부 출근 전: 영어 단어 30개, 명상 15분
출근 중: 오디오북 1 챕터
점심 1: 식사하며 경제뉴스 3개 스크랩
1부 퇴근 후~2부 출근 전: 피트니스 40분
2부 퇴근 후: 유튜브 촬영 or 전자책 집필
나는 그걸 보고 조용히 물 한 잔 마시며 생각했다.
“이 사람들 언제 똥 싸지…?”
SNS에는 새로운 유행어가 생겼다. #48시간_뽕 뽑기 #하루를_갈아넣는_중 #남들_자는_시간이_내_기회
누군가는 말한다.
“예전엔 시간이 없어서 못 했는데, 지금은 안 하면 뒤처지는 느낌이에요.”
잠깐만. 이건 혹시… 자율적인 척하는 자발적 노예 상태 아닌가?
사람들은 이제 시간을 ‘자산’이자 ‘무기’처럼 쓰고 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일하고, 더 움직이고, 더 쌓아야 이 48시간짜리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물론 거기엔 경쟁도 있다. 1시간이라도 낭비하면 누군가에게 밀린 것 같다는 불안감.
그리고 그 불안은 커피, 루틴, 앱, 코칭, 자격증, 온라인 수업으로 환전된다.
사람들은 24시간 시대에도 피곤했지만, 48시간 시대에는 더 피곤한 척을 못 하게 됐다.
“너 시간 많잖아?”
이 말은 이 시대의 가장 무서운 잔소리였다.
어느 날 저녁, 집에 들어가자 아들이 물었다.
“아빠는 왜 밤마다 아무것도 안 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죄책감에, 그날 새벽 2시에 뜬금없이 플라잉 요가 수업에 등록했다.
시간이 많아지면 여유가 생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여유는 곧 ‘불안’으로 변했고, 우리는 그 불안을 달래기 위해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비교했다.
문제는 시간 부족이 아니었다. 욕망이 늘어난 것이었다.
48시간짜리 하루는 삶의 용량이 커진 게 아니라, 삶의 압박이 배로 늘어난 시간이었다.
일주일 동안 48시간짜리 하루를 살아봤다.
시간은 확실히 많았다. 두 끼가 아니라 네 끼를 먹었고, 출퇴근은 한 달치를 일주일 만에 끝냈고, 가족 얼굴은 하루에 네 번 봤고, 세탁기는 1부와 2부로 번갈아 돌아갔다.
삶은 더 풍성해졌고, 할 일은 더 많아졌고, 해야 할 이유는 점점 희미해졌다.
그리고 어느 조용한 밤, 밤 23시간쯤 되었을 때, 나는 혼자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도시는 자고 있었고, 밤은 깊숙했고, 내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48시간짜리 하루가 앞으로 평생 계속된다면… 나는 뭘 먼저 줄여야 하지?”
더 일할 수도 있고, 더 배울 수도 있고, 더 모을 수도 있고, 더 남을 이길 수도 있지만…
문득 깨달았다.
“나는 이 많은 시간 속에서 나를 더 사랑한 적은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스마트워치를 벗었다. 걸음 수, 수면 시간, 집중 시간, 생산성 그래프…
그 모든 게 내 하루를 관리해 주었지만 정작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는 알려주지 못했다.
결국, 나는 이렇게 정리했다.
일 대신 산책을, 수업 대신 침묵을, 자기 계발 대신 가족과의 대화를, 더 나은 미래 대신 지금 이 순간을 택하겠다고.
48시간을 살아보니 알게 되었다. 문제는 시간이 없던 게 아니었다.
우리는 그 시간 안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시간이 늘어나면 인생도 늘어날 줄 알았다.
그런데 인생은 늘어나는 게 아니라, 선택으로 방향을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습관처럼 말한다.
“시간이 없어서 못 했어요.”
하지만 그 말속에는 삶을 어디에 쓰고 있는지조차 묻지 않는 무의식적인 방어막이 깔려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 질문을 이렇게 바꾼다.
“그 시간을 진심으로 원했던가?”
“그 시간은 나를 살게 했는가, 아니면 단지 버티게 했는가?”
“그 순간, 나는 혼자였는가, 아니면 함께였는가?”
삶은 늘 분주하다. 바쁜 건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제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의심할 줄 아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
그래서 가끔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 하나를 꺼내본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진짜 내 삶을 향해 걷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