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레이숲풀 Mar 27. 2022

인생 클레임 처리 매뉴얼(2)

직/간접적인 원인분석

증상이 있던 당시,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맞는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정신과에서 진단을 받고서야 알게 되었고 그 당시 증상을 기준으로 자가진단을 해보았다.


65점 기준인 번아웃은 80점, 10점 기준인 우울증은 27점으로 나타났다. 즉, 내 증상들의 직접적인 원인은 번아웃과 우울증임이 확실했다.


이제 그 번아웃과 우울증을 일으킨 가장 큰 원인, 증상들의 간접적인 원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인간관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경험한 좌절들


내 일의 1/10도 주지 않았는데 다 떠 넘겼다며 퇴사해 버린 신입 친구가 있는가 하면, 너무 바빠서 본인의 일이니 와서 봐달라는 부탁을 몇 번 했다고 개념 없는 언행을 하는 후배에, 잘 따라줘서 고마워 아껴주었는데 알고 보니 나와 동료들을 이간질하고 다니고 있었던 후배까지. 나는 최선을 다하고 배려했지만 돌아오는 건 오해, 비난, 그리고 배신이라는 생각에 꽤 지쳐있었다.


마음 정리가 필요하여 친한 친구와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또 한 번의 좌절을 겪었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에서는 저녁 모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한 분을 새롭게 만나게 되었다. 나와 대화가 꽤나 잘 통한다 생각했는데 그분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자리를 옮겨서도 계속 내 옆에 와서 주로 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덕분에 지쳤던 기분을 잠시나마 풀 수 있어 오길 잘했다 생각 중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제주까지 즐기고 서울로 돌아가면 다시 힘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었다. 내 친구가 취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술에 잔뜩 취해 어딘가 다녀온 후부터 내 친구는 그분에게 격하게 호감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내 좌절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러 온 여행인 것도 알고 있고, 그 새로운 분과 계속된 대화도 모두 지켜봤음에도 말이다. 대체 얘가 뭘 하는 짓인가 싶어 한참을 지켜봤는데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이 친구가 내게서 좋은 사람을 빼앗아간 게 처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 행동을 또 했다는 게 1차 충격이었고 더군다나 치유가 필요하다는 내게 다른 사람도 아닌 절친한 친구가 그런 행동으로 상처를 준다는 게 2차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간의 모든 과정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내가 너무 싫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가족들은 함께 가게를 운영하며 예민해져서 서로를 미워하고 내 앞에서 잦은 다툼을 했다. 애써 유지해온 가족관계가 틀어지는 것도 힘들었고 매일 반복되는 엄마의 하소연도 너무나 힘들었다. 앞서 언급한 좌절을 동시에 겪은 직후여서 엄마의 하소연은 마치 이미 멍이 가득한 몸에 또 내려치는 회초리처럼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너무 외롭게 사셨기 때문에 나 외에 의지하며 그런 말을 하실 곳이 없음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외면하면 엄마가 나 대신 잘못될 것 같았다.


가스 라이팅 하는 상사


그 상사가 있는 회사에 입사하기 전, 나는 좌절들로 인해 사람에 대한 실망이 큰 것은 물론이고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잘못되었던 것 같은 마음에 일에도 자신이 없어졌었다. 그래서 기존의 직무를 살려 직장생활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 숨이 턱 막혔다. 그렇다고 다른 일을 도전하기 위해 무언가 배우기엔 주머니 사정은 여의치 않았고 사실 그 역시도 나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1년을 방황하다 결국은 같은 직무로 다른 회사에 입사를 했다.     


기간 길기도 했지만 그간 제조사 경력만 있다가 처음으로 중견 브랜드사에 입사한 터라 처음 접하는 업무가 너무 많았다. 물론 이 부분은 면접 시 다 얘기했던 내용이지만 상사는 그 사실을 모두 잊은 듯이 나를 짓밟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중국 법령을 처음 접하는, 게다가 내 업무도 아니고 잠시 도움을 주는 상황일 뿐인 나에게 법령을 모른다며 벌레 취급하거나, '시간 경과에 따른 변화'를 '경시변화'로 쓰지 않았다고 정신 나간 인간으로 취급했다. 또 어느 날은 누가 봐도 충원 대상으로 적합한 A와 아르바이트로도 뽑지 못할 것 같은 B의 이력서를 한부씩 가져와 선택하기를 강요했다. A를 택하면 이런 인재가 우리 회사에 오겠냐며 놓치면 다시는 충원 기회가 없다고 압박하고 B를 택하면 이런 애랑 일할 수 있겠냐며 고생은 네가 하는 건데 생각 좀 하라며 괴롭혔다. 아무리 타당한 근거를 대며 얘기해도 어딜 택하든 계속 틀린 사람만 만들었다. 선택하는 법을 가르쳐주려는 언행은 절대로 아니었다. 절대로.

당연히 처음에는 반박도 어느 정도 했다. 그러나 결국 일부일지언정 내가 모르는 부분들이 있는 건 사실이었고 반박할수록 더 괴롭히기 때문에 점차 포기해 갔다. 그리고 작은 실수는 심각한 듯 키워 혼내고 내가 본인보다 잘하고 잘 아는 것이 있으면 그건 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반대하며 잘못한 사람으로 몰아갔다. 그리고는 집에 갈 때는 메신저로 ‘나는 너를 응원하고 있어, 잘하고 있단다.’라는 식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당시엔 몰랐지만 이미 가스 라이팅을 당하고 있었기에, 하루 종일 트집만 잡는 인간임에도 그 상사를 이렇게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내가 잘되라고 그러는 거겠지, 그리고 이렇게 응원하는데 좋은 사람일 거야.’     


그 결과 결국 나는 혼자서는 뭘 결정할 줄도 모르고, 하는 것도 아는 것도 생각도 없는 사람으로 어느새 변해 있었다. 더이상 밝고 든든한 나는 없었다. 더 나아가 모든 문제는 다 내 탓이라 느꼈고 내가 하는 모든 게 다 틀리다 지적받는 게 너무 두려웠으며 스스로 쓸모없게 느껴졌다.      


가장 의지했던, 그러나 가장 큰 비수를 꽂은 친구

나를 괴롭히는 그 상사 때문에 매일매일 울면서 다음 날 깨지 않기를 바라며 잠들었다. 이건 필히 문제가 있다 생각되어 정신과에 방문했고 ‘번아웃’ 및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치료도 중요하지만 친구와의 대화에서 얻는 힘도 컸기에 상사의 괴롭힘에 참다 참다 견딜 수 없을 때는 종종 친구에게 하소연을 하곤 했다. 일이 발생한 그날은 특히나 너무 힘들어서 친구에게 메신저로 몇 마디를 했지만 이내 ‘좋은 말도 한두 번인데 얼마나 듣기 싫을까’ 싶어 져 사과를 했다. 하지만 돌아온 말은 차가웠다.      


"에휴. 요즘 자꾸 안 좋은 말만 해서 너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드는 것 같아. 정말 미안하다."     

"그건 괜찮은데, 쓰레기통이라고 좀 하지 마. 표현이 너무 기분 나빠."     


그때의 나에겐 '그건 괜찮은데'는 보이지 않았다. '기분 나빠'만 보였다. ‘나는 죽어가면서도 미안하다고 사과하는데 너는 니 감정만 중요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벼랑 끝에서 겨우 붙잡고 있던 희망의 끈이 끊어져 버린 기분이었다. 그렇게 더 이상은 쥐어짜 내던 힘마저 나지 않는 완전 소진의 상태가 되었다. 정신과 치료도 중단해버렸다.




우울한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인지적 오류를 일으킨다.

1. 이분법적 생각으로 자신에 대하여 실패 또는 성공으로 판단한다.
2. 선택적 추상화로 전반적인 긍정의 평가보다 일부의 부정적 평가에 집중한다.
3. 과도한 일반화로 새로운 것에 도전하게 될 때 항상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울증의 인지적 왜곡 (정신이 건강해야 삶이 행복합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악의를 가득 품은 상사를 제외하면, 모두 이러한 인지적 오류로 인한 사고였겠지만 당시의 나는 알 수 없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