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클레임 처리 매뉴얼
내 인생에 스스로 클레임을 걸고 처리하며 큰 효과를 보았던 나는 회사에서 했던 방식처럼 '인생 클레임 처리 매뉴얼'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배포하고 싶어졌다.
우선 회사에서 일반적으로 처리하는 클레임을 설명해보자면 이렇다.
현상파악 - 직/간접 원인 분석 - 근본 원인 분석 – 개선활동 - 재발방지대책 마련 – 불만처리 보고서 작성 및 종료 처리 – 분석 및 관리 지표 설정
예를 들어 내용물이 세어 나온다는 클레임을 받았다고 해보자. 내용물 누액이라는 '현상파악'은 이미 완료 되었으므로 원인을 분석해야 한다. 펌프를 열어보니 토출구(=내용물이 나오는 부분)가 파손되어 있다는 직접적인 원인이 밝혀졌다. 그럼 그 파손은 원자재 자체가 파손되어 있던 것인지, 조립 중 혹은 물류 이동 중 파손된 것인지 간접 원인을 분석해야 한다. 알아보니 조립 중 파손이었다면 원자재 자체가 너무 약했던 것인지, 아니면 조립을 너무 강하게 해서 파손된 것인지 근본 원인까지 알아내야 한다. 그렇게 조립이 강했다는 것을 알게되면 조립 강도를 조정하는 개선활동을 하여 문제 없는 상품을 만든다. 그리고 그 조립 강도를 지정한 표준서를 만들어 다음 생산 시 기준을 준수하도록 함으로써 재발을 방지한다. 이 과정이 완료되면 그간의 내용을 보고서로 만들어 종료 처리하고 이러한 클레임 이력을 가지고 관리 지표를 설정하여 다음 사업계획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고통의 나날들
클레임에서 현상 파악에 해당되는 단계로 나에게는 증상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증상이 있었지만 가장 심각한 것 몇가지만 상세히 풀어본다면 이러했다.
먼저 과한 식욕이 있었다. 배가 찼다는 '사실'은 느껴지는데 배가 부르다는 '느낌'은 없는, 마치 마비된 상태 같았다. 먹고 싶다는 기분보다는 먹어야 한다는 기분이 더 맞았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맛있는 것을 먹으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는데 이 땐 그렇게나 먹으면서도 짜증과 분노는 더 심해졌다. 하루는 TV 막장드라마를 보면서 개념 없는 주인공의 모습에 '저런 정신 나간 인간이 있나. 자긴 잘못이 없고 피해만 봤지?'하면서 진심으로 화내는 나를 마주한 적도 있었다.
억울하거나 화나는 일, 또는 어떤 해결이 필요한 문제에 직면하면 어김없이 증상이 나타났다. 특히 두통이 심했는데 그건 이전에는 겪어본 적 없는 극심한 두통이 있었다. 표현하기 어렵지만 굳이 말하자면 머릿속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머리를 마구 때린 적도 있고 한 번은 12층이었음에도 창문 밖으로 뛰어 나가고 싶은 충동이 가득했던 아찔한 경험도 있다. 이러한 증상이 반복되자 불안감도 점차 커져서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호흡하기가 힘들 때도 종종 있었다.
생각은 온통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예전 같으면 별 것 아니라 생각할만한 것에도 크게 상처받는다거나 어떤 사건에 있어 좋은 부분과 나쁜 부분이 공존해도 내 눈에는 나쁜 부분만 부각되어 보였다. 그래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나쁜 상황뿐이라 생각했다. 생각 뿐 아니라 실제로도 불안, 비난, 실패와 같은 상황에 놓이는 때가 잦아져 있었고 이는 업무능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내가 하는 것은 그 무엇도 수용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결국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그와 관련된 기억이 희미하고 잘 인지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연히 사고는 원활하지 않았고 논리도 없으니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창의성이 발휘될 리 만무했다. 해결은커녕 문제가 발생하는 것 자체가 심각한 공포였다.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어느 날부턴가 이대로 눈을 감으면 깨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죽고 싶은데 겁은 또 너무 많아서 아플까 봐 걱정이 컸다. 또 그렇게 깨지 못하면 나는 이 세상을 살다 죽은 게 아니라 원래 없던 것처럼 흔적 없이 사라졌으면 했다. 떠난 나 때문에 힘들어할 내 가족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 죽고 싶은데 죽기 싫어했다. 정확히는 죽고 싶은 게 아니라 힘들게 사는 걸 멈추고 싶었던 것뿐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