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나는 배부른 줄도 모르고 음식을 먹고 있고 시도 때도 없이 몸을 긁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밤이 되면 잠들지 못하거나 악몽을 꾸며 1시간마다 깨어나기 일쑤였고, 화장실은 못 가면서 위가 꼬이는 고통을 느끼는 날이 있는가 하면 장염으로 모든 것을 위아래로 쏟아내는 날도 있었다.
어느 날은 동료가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어떻게 알았냐고 했더니, 한숨을 그렇게 쉬는데 어떻게 모르냐고 했다. 인지한 이후로는 조심하고 싶었지만 갈수록 심해질 뿐이었다. 짜증도 늘어났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신경질이 났고 심지어는 TV 막장드라마를 보면서 개념 없는 주인공의 모습에 정말 진심을 다해 화내는 나를 마주한 적도 있었다.
그런 분노와 짜증을 넘어가자 이제는 무기력해져 방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부정적인 생각이 나를 지배했고 모든 업무능력이 저하되었다. 그로 인해 과한 긴장감이 생겨 불안감, 극심한 두통, 심박수 증가와 호흡 문제 등도 잇따라 발생했다. 결국 자존감은 현저히 저하되었고 삶의 의지마저 잃어버렸다.
바로 번아웃 그리고 우울증이었기 때문이었다. 깨달은 후 약 4년에 걸쳐 심각한 상황은 벗어났지만 남아 있는 문제들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무기력, 무의미, 클레임
퇴사 후 하루, 이틀, 한 달이 지나도록 재취업을 못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클레임 처리 업무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화장품 품질담당자 9년 차 경력자이다. 당연히 빈번히 내/외부 클레임을 받아왔다. 하지만 번아웃과 우울증으로 인해 문제 해결 능력이 저하된 후에는 막중한 책임감으로 해결해야 하는 클레임은 늘 고통 그 자체였다. 그리고 겨우 벗어난 그 고통에 다시 뛰어들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클레임을 제외한 업무는 자신이 있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법규 대응, 매뉴얼 제/개정, 내용물 테스트, 제조사 핸들링 등 분명 많은 업무를 해왔고 무리 없이 잘 처리했던 것들이 많은데도 어찌 된 것이 하나도 자신이 없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할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나는 모든 업무능력이 저하된 사람이라, 하던 것도 못하는데 새로운 것을 잘 해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나는 왜,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급기야는 내 인생 자체가 쓸모없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아무래도 다시 우울증에 빠질 것만 같아 생각을 바로 잡으려 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무엇이, 어떻게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라는 질문은 늘 내가 클레임을 처리할 때 해왔던 질문이었다. 내가 그토록 피하려 했던 클레임 처리 방법이 곧 내 인생을 바꿔줄 키가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하다 하다 스스로 내 인생에 클레임을 걸어버리고 처리해보기로 했다.
놀라운 효과
효과는 놀라웠다. 발표하며 떨리는 마음은 아직 남아있지만 적어도 청중에게서 감출 수 있게 되었고 들키지 않으니 떨리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던 내가 나와 같은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그래서 보고서 한 장 쓰기 어렵던 무기력하던 과거의 나는 사라지고 지금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즐거워하며 글을 쓴다. 이 글을 보는 누군가가 나의 과거처럼 너무 힘들게 헤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하고 각자 자신의 방법을 찾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고통스럽기만 하고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경험이 내가 다시 잘 살아가는데 엄청난 도움을 준 셈이다. 이를 계기로 많은 부분들을 되짚어보며 깨달음을 얻었고 어느새 바닥에 있던 내 자존감은 과거에 비해 꽤나 높아져 있었다. 인생에 쓸모없는 경험이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