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레이숲풀 Mar 27. 2022

그래, 뜻대로 되면 내 인생이 아니지

인생에 쓸모없는 경험은 없습니다.

뜻대로 되면 내 인생이 아니지


재수는 절대 안 돼! 대학 입학 후 한 학기 만에 자퇴.

퇴사는 절대 안 돼! 입사 후 1년 만에 퇴사.

삼수는 절대 안 돼! 편입학.

다시는 이직은 안 해! 9년 차 경력 중 총 네 번의 이직.




성공한 유명인이 TV에 나와 매일매일 계획한 그대로 행동하는 습관이 성공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또 어떤 유명인은 계획한 인생의 그림 그대로 살고 있다고 했고 역시 성공한 인생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째 뜻대로 하려고 하면 더 꼬이는 것만 같다.


고등학생 때 일이다. 빨리 졸업하고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었던 나는 내 인생에 있어 절대로 재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평소 성적이 좋은 편이라 1차 수시는 꽤나 상향 지원했는데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어차피 1차 수시는 경험! 2차 수시를 노리고 있던 중 갑자기 학업에 집중하지 못할 사건이 발생했고 해당 학기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그동안의 성적이 워낙 높았으니 한 학기 정도로 심각한 차이를 빚지는 않을 것이라는, 선생님과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2차 수시마저 우수수 탈락하기에 이른다. 결국 그 당시 '여기가 어딘가' 싶었던 곳에 지원했다가 합격해버리고 말았고 한 학기 만에 자퇴하게 된다.


자퇴 후 다음 해에 원하는 학과에 합격했지만 이미 1년을 버린 상태이고 당시 집안 사정도 넉넉지 않았기 때문에 4년을 더 기다릴 수 없다 생각했다. 결국 2년 제로 대충 지원해서 입학해버렸다. 빨리 돈을 벌어 집을 안정시키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충분한 준비 없이 그저 졸업 전 합격한 곳 중에서 골라 입사를 했다. 그리고 절대 퇴사 없이 열심히 일하려고 했다. 하지만 현실을 마주했다. 입사 10년 차가 된 경영지원팀 여자분은 아직도 사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겨우 10 몇 년 전일뿐이지만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게 큰일 날 정도는 아니었던 시대라서 10년 차 여사원도 별로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내 미래도 그럴 것만 같았다. 성적이 하위권도 아니었던 내가 10년 뒤에도 사원이기엔 뭔가 억울하기도 했고 돈을 빨리, 많이 버는 목표는 절대 이룰 수 없을 것 같아 결국 입사 1년 만에 학업을 위해 퇴사 했다.


재수도 안된다던 내가 삼수로 편입을 하다니. 그나마 다행인 건 퇴사와 동시에 편입했기 때문에 그 시기만큼은 시간을 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미 친구들보다 2년 이상 늦게 졸업한 상태였기 때문에 정말 절대로 다시는 쉬는 기간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허나 졸업 후 첫 회사는 연장 없는 단기 계약직이라 어쩔 수 없이 두 번째 이직을 했다.


세 번째 회사에서2년 반 동안 열심히 다녔다. 정말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야근, 특근도 마다하지 않고 악착같이 일했는데 도를 지나쳤는지 이번엔 체력, 정신력이 방전되어버렸다. 그렇게 퇴사 후 1년 반의 허송세월을 보내다 세 번째 이직을 하게 된다.


네 번째 회사에 입사한 후 또 이직을 하면 나는 의지박약 혹은 나만 예민한 별종 인간이 될 것만 같았다. 온갖 트집을 잡고 괴롭히는 정신 나간 상사와 일하면서도 기를 쓰고 버텼는데 그 탓에 이번엔 방전을 넘어 아예 고장이 나버렸다. 글이 잘 써지지 않고 대화에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생겼다. 감정도 조절되지 않았다. 결국 번아웃과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렇게 또다시 퇴사를 했다. 내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었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절대로 하지 말자는 것들만 다 해버린 한심하고 쓸모없는 인간이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이라 생각했다.


뜻대로 되지 않아 지금의 내가 있다.


'실패를 딛고 일어선 희망의 아이콘!'


이렇게 불리면 참 좋겠지만, 난 아직도 번아웃과 우울증을 완벽히 극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꾸준히 관리하고 회복하는 방법을 너무나 잘 터득했고 그로 인해 꿈이 하나 생겼다. 나와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돕는 것. 결국 내가 이것만은 절대 하지 말자고 했던 것들을 실패한 덕분에 오히려 돈 때문이 아닌 꿈이라는 것을 다시 가져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덕에 수많은 실패는 사실 깨달음의 기회였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었고 사건들을 되짚어 보았다.


고3 시절 한 학기 성적이 곤두박질친 후, 성적이 나오기 전에 수시 원서를 넣고 있었기 때문에 담임 선생님은 내 성적의 하락 정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계셨다. 그래서 원래 성적을 감안해서 떨어져도 이 정도겠거니 하고 상향지원을 안내하셨고 나는 '선생님이신데 나보다 잘 아시겠지' 하며 그대로 따라버렸다. 내 성적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 한 번쯤은 제대로 의견을 피력했다면, 뒤늦게 하게 된 원치 않 하향지원을 막았을지도 모른다. 내게 확신이 있다면, 그리고 필요하다면 내 주장도 할 줄 알아야 함을 뒤늦게 알았다.


인생은 마라톤인데 단거리 선수처럼 처음부터 전속력으로 달려 버렸나보다. 빨리 취업해서 돈만 벌면 다 되는 줄 알았던 게 오산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4년제를 졸업했으면 그 4년간 체력을 안배하고 골인 지점에서 막판 스퍼트를 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입사한 김에 꾸준히 일하고 성장했으면 10년 차에는 사원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안될 거라 생각하는 것들이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다 같이 힘들게 일하는데 나만 유독 힘든 것은, 알고 보면 그들은 그 상황 외에 방전될 또 다른 상황이 없어 충전이 가능해서였을지 모른다. 아니, 그렇지 않고 정말 똑같은 상황에 놓였더라도, 누가 약하다고 비난하더라도, 내 배터리 용량이 남들보다 적어 금방 방전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힘들면 무조건 퇴사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스스로를 얽매다 터지는 것보다는 낫고, 놔줄 때가 필요하기도 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이제 절대로 뭘 하지 말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차피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을 안다. 그냥 하는 대로 하고 안되면 다시 하면 된다. 심리, 동물 관련 자격증을 따고 여행을 접목해서 힐링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 내 새로운 미래 계획이다. 그래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다. 그런데 만약, 정말 만약 결국 이쪽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더라도 나는 이미 배운 것들이 너무 많아져 있다. 그것은 필히 내가 어딜 가든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사업을 실패하고 학업을 실패할 수는 있어도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은 있어도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