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텔레비전의 진화였다. 케이블이나 인터넷 티브이를 보지 않는 우리 집에는 정규채널 딱 네 개만 나왔는데 어느 순간 텔레비전 제조사에서 운영하는 채널들이 추가되며 20년도 더 된 드라마부터, 뉴스, 시대가 뒤섞인 예능 프로그램이 24시간 나오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 자체가 많지 않고 특히 예능은 연예인들끼리 수다 떨고, 내가 아닌 그들이 맛있는 거 먹는 것을 보는 게 무슨 소용이냐며 거의 보지 않았던 나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용을 따져가며 보는 게 아니었던 거다. 아무 생각 없이 흐흐흐 거리면서 웃다가 중간중간 폭소를 터뜨리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물개 박수를 하며 보고 있다.내가 대학 다닐 때 나왔던 그 예능인이 지금도 나와 툭툭 던지는 시의적절 하면서도 위트 있는 멘트를 보면서 오래 인기를 누리는 사람들은 뭔가 다르구나 하는 뜬금없는 깨달음까지 얻는다.
그런데 문제는 먹는 장면이 너무나 많이 나온다는 거다. 대놓고 맛있는 음식 찾아다니는 프로그램도 아닌데 출연자가먹는 모습이 차지하는 분량이 상당하다. 연예인이 혼자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더니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며 윤기 나는 음식은 계속 클로즈업되고 입 속에 특수 마이크라도 장착한 듯 아삭아삭 씹는 소리가 선명하다. 팀을 짜서 게임을 하고서 이긴 팀이 포상으로 받아 든 남도 밥상에서 깻잎 무침을 한 장 쫙 뜨는데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간다. 하나같이 맛있게 먹는 방법을 연구한 것처럼 보는 사람 침샘 자극하게 먹는다.저녁 먹고 치운 지 별로 안됐다며 조금 남은 이성으로 참아보고자 하는데 우리도 저거 먹으면 안 되냐는 장화 신은 고양이 눈이 나를 본다. 그리고 이렇게 야식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내가 누워야 눕고, 중간중간 깨서 엄마가 있나 없나를 손으로 만져 보고 엄마가 없으면 벌떡 일어나 울면서 밖으로 나오는 아이 덕에 아주 오랜 기간 새나라의 어린이 생활을 했다. 건강상의 이유나 체중감량을 위한 자제도 아니요, 오로지 이 이유로 10년 가까이 여행과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야 한밤 중에 음식 먹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 야식을 시작하니까 밤이 되면 자꾸 출출하다. 분명 배가 고픈 것은 아니다. 밥을 한번 더 먹을 거냐면 분명히 안 먹겠다고 할 거다. 그런데 뭔가 짭짤한 것, 매콤한 것이 자꾸 당긴다. 밥과는 다르게 한껏 여유를 부리며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면 새나라의 어린이에서 여유로운 한량으로 대변신한 것 같다. 하루를 더 길고 알차게 여유롭게 마무리하고 있다는흐뭇함을 느낀다.
그런데 드디어 사건이 터졌다.나비효과의 종착점.
어플과 연결해 놓은 우리 집 체중계는 이전의 몸무게를 기억한다. 서로 다른 사람이 올라가면 각각 구분하여 각자 몸무게의 추이를 기록한다. 그런데 오늘 오랜만에 체중계에 올라가니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세요"란다. 급격히 몸무게가 늘자 나를 잊고 새로운 사람으로 인식한 거다. 낯선 숫자도 당황스러운데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체중계에 '오매' 감탄사가 나온다. 이쪽 방면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계획은 전혀 없었는데. 사람들이 야식을 끊고자 노력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였다.
반사적으로 아, 야식을 끊어야겠다 한다. 그런데 잠시 후 야식을 끊어 얻는 것과 야식을 먹으며 느끼는 재미의 경중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후자가 우세한 거다. 물론 바지가 자꾸 꼬옥 맞다 싶고 분명 화장실에 갔다 왔는데 안 갔다 온 것 같은 배 모양이 거슬리기는 했으나, 작년에 너무 커서 흉하다 했던 바지가 아주 딱 맞는 긍정적 효과도 있지 않은가. 일단 나의 뇌를 통째로 비우고 오로지 웃고 먹는 그 시간의 즐거움을 포기를 못하겠는 거다.
뭐, 시간이 더 지나면 이제 밤에 졸려서 야식을 못 먹을지도 모른다. 새로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고 완전 새 삶을 사는 것도 힘든데, 체중계에서만이라도 새롭게 태어날까 보다.
다음에 몸무게를 잴 때 또 네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사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 인물, '경계성 미니멀'을 신규 등록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