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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성미니멀 Jul 06. 2023

결제 금액에 0 하나를 더 붙였다

 저녁을 먹고 나름 슬기로운 경제생활을 하겠다며 사용하는 모바일 지역상품권으로 결제를 하면서 0 하나를 더 붙였다. 아차 하고 '뒤로' 버튼을 눌렀는데 이미 승인. 신용카드와 달리 사장님이 앱에서 취소해야 한다는데 방금 나가셨단다. 한참을 기다렸는데 이번에는 에러가 난다. 그러고 일주일 째 해결되지 않았다. 손가락 한번 잘못 까딱는데 여파가 오래간다. 


 전에는 미용실에 도착해 모바일 예약 확인을 하는데 얼라, 취소되어있다. 그것도 어제 날짜다. 며칠 전 날짜를 수정한다 해놓고 취소까지만 하고 다시 예약을 안 했다. 그래 놓고 오늘 7시에 딱 맞춰 왔다. 자신과의 약속이냐.


 지난달엔가는 일주일에 한 번 오는 트럭에서 통닭을 사 왔는데 집에 와 핸드폰을 들었더니 은행 오류 화면이다. 사장님한테 예금주 확인했는데 그러고 나서 이체를 안 눌렀나 보다.


 이 정도면 거의 치매 간증의 장이다. 딱 부러지고 빠릿빠릿했던 것도 같은데 요새 이렇게 실수를 한다. 딸에게도 참으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직언을 하시는 친정 엄마 표현으로는 총기를 잃었단다.


내 총기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총기가 아니었다.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고 어긋남 없이 진행하기 위해 늘 긴장해 있던 덕이다. 스스로에게 윧유독 엄격했고 관대하지 못했다. 사소한 실수도 크게 책망했다. 해마다 빼곡하게 계획을 세웠다. 카테고리별로 세부 사항을 써넣으며 지금보다 더 성장한 내가 되겠다며 굳은 다짐을 하곤 했다. 월간, 주간, 일간 디테일한 계획을 세우고 1년 내내 채찍질했다. 똑같이 주어진 24시간을 남들보다 더 알차게 쓰겠다며 분주히 보냈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시간에는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다.

pixabay

'미래의 나'라는 존재는 안중에서 사라지고 지금 당장  24시간 붙어 챙겨야 할 존재가 생 후로 인생은 리셋 버튼을 누른 듯 바뀌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열심히 노력해도 아무리 책을 읽어가며 공부를 해도 육아는 내 뜻대로 되지 않았고 내가 짜놓은 계획 따위는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사소한 외출 일정마저 아이의 땡깡 한 번에 모조리 엎어지면 그게 뭐라고 화가 나는 자신을 마주했다. 그나마 바꿀 수 있는 것은 나였다. 미리 계획을 짜지 말고 그때그때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해결책이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도 더 이상 목표를 세우지 않게 된 것은 내가 계획한 대로 인생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결코 원하지 않았던 계기로 알게 된 그때부터일 테다. 세세하게 단기 장기 계획을 세워봤자 열심히 달리고 있는 내 머리 위로 벼락이 뚝 떨어지는 것 같은 일이 생기기도 하는 거였다. 부득부득 더 나은 내가 되겠다며 지금의 나를 희생하고, 더 바람직한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 지금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꾸욱 참고 견디며 한다는 것은 참으로 우습고 효율적이지 않은 것이었다.


 주도면밀하게 살면 몹시 피곤하다.

 실수 좀 해 보니, 한 번 실수한다고 엄청난 타격을 입는 것도 아니다. 귀찮긴 해도 어지간하면 다 수습이 된다. 무전취식할 뻔한 위기도 운 좋게 그날 발견했다. 일주일 뒤 다시 트럭이 올 때까지 기다릴 뻔했다. 사장님은 이렇게 다시 오신 분은 없다며 고맙다고까지 해주신다. 자신과의 약속으로 간 미용실에서는 마침 손님이 없다며 마음에 쏙 들게 머리카락을 잘라주셨다. 0 하나 더 붙인 음식점에서는 본인 계좌로 돈을 받았다며 밥값 빼고 내 계좌로 보내주신다 하니 오랜만에 월급 말고 '입금' 내역을 볼 수 있게 됐다. 순기능이다.


 솔직히, 아직도 실수하면 좋지 않다. 하지만 실수 안 하겠다고 피곤하게 나를 닦달하는 건 더 나쁘다. 0 하나 더 눌렀다고 손가락을 탓하면 안 된다. 하루에 셀 수 없게, 동시에도 몇 개씩 일을 척척 해내고 있는데 실수 몇 번 한다고 나를 미워하면 안 된다. 

편하게 살자.

몹시도 게으르게 몇 년째 똑같은 한 가지 목표만 덜렁 가지고 자잘한 계획 따위 세우지 않는다. 좀 더 나은 내가 되겠다며 애쓰지 않는다. 딱히 거창하게 이룬 것이 것도 아니면서 정신 건강을 위해 지금까지 읽고 들은 것들을 적절하게 조합 스스로를 설득하는 기술을 연마했더니 나름 또 지금의 내가 흡족하다. 매 순간 어떻게 하면 몸과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편할 수 있을까를 궁리한다. 선택의 기로에서는 내 심신이 편한 것이 일관적인 기준이다.


나는 계속 실수를 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신년 계획을 잘 지키고 있는 거.

대단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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