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싯적 "어제도 했는데, 오늘 또 해요?" 류의 문장만 사용했다 하면 마치 공식 매뉴얼이라도 있는 듯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너는 아침에 밥 먹었다고 점심에 안 먹냐?"
고대 동굴 벽에도 상형문자로 쓰여 있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40대 워킹맘은 아침에 밥 먹으면 점심 저녁은 안 먹어도 되면 좋겠다. 집에서 먹고 치우고 먹고 치우고를 몇 번만 반복하면 진이 빠지며 알약 두 알만 삼키면 영양성분이 완벽한 한 끼가 되는 제품 개발을 꿈꾼다. 먹는 즐거움의 비중이 크다 못해 약간의 식탐마저 의심스러운 나조차도 이런 생각을 하니 딱히 식욕이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고될까.
네이버영화 무려 1993년에 개봉한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남자 주인공은 하루가 반복되는 마법에 걸린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제 들었던 라디오 멘트가 똑같이 나오고 사람들은 오늘도 어제의 축제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어제가 오늘이고 내일도 오늘이다,
설거지를 하며 어제도 딱 이 시간에 똑같은 자세로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넣고 있었는데 싶다가 아 그게 어제가 아니라 그저께였나 의심한다. 매일은 물론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는 같은 집안일. 이렇게 끊임없이 움직이는데 어쩌면 계속해서 새로이 할 일이 생길 수 있을까. 그렇다고 손 놓고 안치우면 카오스의 의미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신기하다.
원탑은 주방. 부엌일은 무한반복에 더해 자가증식까지 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 와중에 안 해도 되는 집안일을 만들기까지는 하지 말자.
@pixabay 한 끼 식사에 딱 맞아 보이는 작은 냄비에 된장국을 끓이는 당신.
된장을 풀고 재료를 넣자 점점 차오른다. 감자, 애호박, 버섯... 하나씩 넣을수록 수위는 올라간다. 두부는 진정 위기였다. 센 불에 후르르 끓여야 제맛인데 끓기 시작하자마자 된장 물이 밖으로 튀기 시작해서 불을 키울 수가 없다.
하릴없이 큰 냄비를 가져와 된장국을 옮겨 담으려는데 뜨거워서 한 번에 확 부을 수가 없다. 일단 국자로 떠 담는다. 국물이 질질질 흐른다. 참지 못하고 냄비를 들어 들이붓는다. 냄비 바깥 면을 타고 내리는 국물이 밉다. 바닥에 야채들이 붙어있다. 알뜰 주걱을 가지고 와서 싹싹 담는다. 끓이려고 보니 주변에 아까 튄 국물이 센 불에 타서 눌어붙을 것 같다. 대충 닦고 시작해야겠다. 이미 지친다.
부엌은 대혼란인데 밥상만 미니멀하다.
@pixabay 큰 용기에 조금 담겨 있다고 큰일 나지 않는다. 그러나 용기가 작아 넘치면 그건 집안일로 연결된다. 설거지하는데 작은 그릇과 큰 그릇에 투입되는 에너지 양이 천지 차일 리 없다. 하지만 한 개와 두 개는 확연히 다르다. 중간에 옮겨 설거지를 배로 만드는 행동은 하지 말자. 어처구니없게 크다 싶은 게 차라리 낫다.
큰 용기에 조금 남았다고 작은 용기로 옮길 필요 역시 없다.
요리한 음식이 남으면 냄비채 식혀서 냉장고에 넣고 다음에 그대로 데워 먹으면 된다. 괜히 그릇에 옮겼다 다시 냄비에 옮겨 끓이고, 또 다른 그릇에 담아 먹지 말자.
김치통의 김치를 반 먹었다고 왜 작은 용기에 옮겨 담아 설거지를 두 번 하는가. 냉장고가 터질 것 같아 요만큼의 공간이라도 지금 당장 필요한 것 아니면 마지막 한 줄기까지 커다란 김치통에서 먹고 한 번에 씻으면 된다.
용기를 한번 옮겨 담을 때 그릇 한 개만 더 필요한 것이 아니다. 국자, 숟가락, 알뜰 주걱, 물과 전기, 무엇보다 옮겨 담고 뒤처리를 하는 나의 에너지가 들어간다. 놀기에도 부족한 바로 그 에너지다.
여기서 잠깐.
남은 음식을 냉장고에 넣기 전 나중에 먹을 것인지 반드시 생각하자. 터무니없이 많은 양을 꺼내 남은 것이 아니라면 남은 음식에는 이유가 있다. 지금 안 먹는 건 대부분 나중에도 안 먹는다. 냉장고 스탑오버 필요 없다. 우리 집 냉장고는 관광지 아니다. 설거지만 늘어난다. 들인 노력과 시간과 재료와 돈이 아깝지만 지금 버리는 것이 그나마 나의 에너지를 포함한 여러 손해를 줄인다.
@ pixabay
통장 잔고가 설거지통에 그릇 쌓이는 속도로 불었다면 우리 모두는 회사 그만두고 놀고먹을 수 있을게다.
혼자서도 참도 잘 늘어나는 집안일, 스스로 늘리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