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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성미니멀 Jan 12. 2024

추억보다 지금의 내가 더 소중하다

추억의 물건 비우기

 평수를 넓혀 가는 이사는 벽이 높다.

 한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딱 그만큼의 평형도 현실은 쉽지 않다. 가능하다고 확신하기도 힘들고 또 언제가 될지 자신할 수 없다.


 넓고 쾌적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지금 당장 내 힘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며 함께 시작한 물건을 비워 지금의 공간을 넓게 만들기.


 지금 쓰지 않는 물건을 몽땅 비우고 쾌적하고 넓은 공간을 얻자는 나와 이게 또 언제 필요할지 모르는 것들인데 그럼 그때 또 돈을 주고 사야 하느냐는 또 다른 나와의 투쟁에 힘들었을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제 거의 다 왔다.


 비우기의 최대 난제, 추억의 물건 비우가 단계까지 온 당신, 일단 칭찬부터 받아야 한다.


 내 주변의 정리가 잘 안 되는 사람들은 특징이 있다.

 옷 정리를 한다어느 순간 이것저것 입어보며 코디를 하며 이 옷에 어울릴 다른 옷을 살 결론을 낸다. 책 버린다면서 엄청난 집중력으로 독서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쓰지 않았던 물건을 비운다더니 이 물건을 이렇게 쓰면 된다면서 전에 없던 창의력까지 발휘한다.

@pixabay

 이런 사람들에게 추억의 물건 비우기는 최대 난코스다. 안 그래도 비우기에 진도가 나가지 않는 판국인데 물건 하나하나를 뜯어보며 지난 시절을 아련하게 떠올리고 있다.

 정리정돈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정리의 여왕 곤도 마리에도 추억의 물건은 가장 마지막으로 비우라고 한 것을 보면 어려운 건 맞나 보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보다 필요한 것은 추억이 아니라 현재다. 지금의 나를 위해 보다 쾌적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공간을 넓히는 거다. 공간을 위해 물건을 비우는 지금, 필요한 물건을 넣기에도 우리의 공간은 족하다.


 다섯 평을 줄여 간다는 마음가짐으로 물건을 비워내자고 하고 있지만 간증하건대 실제로 20평을 줄여 이사가 닥치면 추억의 물건 설임 없이 비워낼 수 있. 지금 당장 필요한 물건들도 넣기에 부족한데 추억의 물건이 대수인가.


 20평 줄인 이사를 앞두고 초등학교 때부터 차곡차곡 모아 왔던 일기장과, 다이어리, 졸업앨범 등은  종량제 봉투에 담겨 바로 버려졌다. '미니멀 라이프'라는 말이 나오기도 훨씬 전부터 단계적으로 버렸던 편지들 모두 비운다. 가장 처음 버 건 고등학교 때 '쓰잘데기 없이' 많이도 썼던 펜팔과의 편지들이었다. '펜팔이 뭐예요?'라고 묻는 젊은이이고 싶지만, 나는 펜팔을 너무 잘 알고 있다.

@pixabay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 학교에 해외 펜팔이 매우 부흥했는데, 그 책임이 내게 약간 있다. 내 남동생 반 친구 이야기를  친구에게 해줬는데 그 소문이 확 퍼진 거다. 일본 학생과 펜팔을 하던 남동생 친구는 '김'을 좋아한다는 일본 친구의 말에 '양반김'을 소포로 보내줬다. 일본 사람들이 김을 아주 좋아하지만, 일본에는 우리의 조미 김 같은 아삭하고 짭짤한 김이 아닌 주먹밥용 김을 주로 먹는다 했다.  그 일본 친구는 '살짝살짝 두 번 구운 양반김'의 맛을 보고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김이 있냐며  '파나소닉 시디플레이어'를 보답의 선물로 보내다.  쇠도끼를 빠트려 금도끼를 받는 것도 아니고, 양반김을 보내 파나소닉 씨디피를 받다니! 그 이야기에 많은 아이들이 해외 펜팔에 뛰어들었다.


 물론 그런 훈훈한  '금도끼' 일화는 더 없었다. 대부분 '너무 고맙다. 너는 나의 베스트 프렌드이다',  아니면 '우리 우정 영원하다' 이런 식의 답장이었고, 일본식 부침개 오코노미야키 가루를 받은 아이가 그나마 나았다.


네이버이미지검색-예나 지금이나 예쁜 김희선배우

  우리 반의 유나는 남아공의 아주 잘생 부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우리가 '남아공 왕자'라고 부른 남자아이와 일 년 가까이 펜팔을 했다. 말은 일 년이지만 왔다 갔다를 우편으로 하다 보니 횟수는 많지 않았는데, 편지를 기다리는 그 기간이 유나에게는 환상을 가공하는 시간이 되어, 유나의 상상 속 남아공 왕자 영화배우급으로 진화했다. 어느 날 그 남아공 왕자가 보내온 사진에는 남자'아이'라고 부르기 멈칫해지는 중후한 분이 목, 팔목, 발목까지 금붙이를 주렁주렁 달고 계셨다. 유나는 사진을 보고는  펜팔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는데,  자신의 부를 자랑하며 유나에게도 사진을 보내달라고 한 남아공 왕자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며, 장난 삼아 예나 지금이나 예쁜 김희선 씨의 사진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남아공 왕자는 '소 아홉 마리 줄 테니 결혼해 주세요' 아주 빠른 답장을 보내왔다.


그 많은 편지들을 비웠지만 후회한 적은 없다. 오히려 지금 내 옆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현재 최선을 다 헤야겠다는 다짐이 커질 뿐이다.


내 물건은 오히려 쉽지만 아이 물건은 비우기 어렵다.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추억이 담긴 아이 물건들 아닌가. 거기에 사진이라도 박혀있으면, 나도 어렵다. 어릴 때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 하나하나 다 보관해 놓고 성인이 되었을 때 보여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땅덩어리 넓은 나라에서 차고 달린 단독주택에 사는 거라면 하나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연도별로 모을 자신 있다.

하지만 추억을 보관하는 것보다는 지금 아이에게 깨끗하게 정리된 공간을 선물해 주는 걸 택한다. 입을 옹 하고 오므리고서 얼마나 열심히 만들었을까 싶은 아이 작품들 역시 일주일 정도 자랑스럽게 전시해 준 후 사진으로 남기기로 한다. 심혈을 기울여 몇 개만 추리자.


 추억의 물건이 지금의 내게 살아갈 에너지를 준다면 그것마저 비우라고 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우리의 한결같은 목표는 지금의 나에게 최선을 다해 최적의 공간을 주는 것 아닌가.


 당장 필요한 물건까지 우선순위에 밀려 가져오지 못했던 20평 줄인 이사에도 아이가 처음으로 삑삑 소리를 내며 신고 돌아다녔던 신발은 비우지 못했다. 대신 나의 신발 하나를 더 비웠고 이 신발은 아직도 우리 집의 작은 신발장 안에 들어있다.

그러나 그 개수가 너무 많다면 조금은 냉정해지자. 한두 개의 물건이면 된다. 나머지는 사진으로 보관해도 된다. 실물을 볼 때는 떠오르는 행복이 사진이라고 떠오르지 않을 리 없다.


 비우기처럼 끝없는 선택을 강요하는 작업이 또 없다. 물건 하나가 태스크다. 그러나 감히 확언하건대 비우기만큼 당신의 현재를 개운하게 만들어주는 것 역시 흔치 않다.


 그렇기에 강하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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