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진상 고객 전화를 끊으면서 한숨을 쉬거나, 참았던 화를 내거나 하는데, 이분은 큰소리 나고 수화기 내려놓자마자 "우리 점심에 짜글이 먹으러 갈까?" 이런다.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을 돌려하지도 않는데, 그게 밉지 않다. 머리를 덜 말린 채 산발을 하고 출근한 용자 대리에게 "용자야, 왜 머리를 미친것처럼 하고 왔어?"하고 묻는데, 그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애써 감췄던 직원들보다몇 배는 더 낫다. 누가 A라고 말하면 그냥 A다. 행간은 없다. 고민을 사서 하는 행동 따위는 없다. 의자에서 엉덩이 떼면 회사 생각은 안 난단다.
그분이 몇 년 전에 동네 아줌마들이랑 점을 보러 갔는데 점쟁이가 보자마자 "팔자에 걱정 하나 없는 것이 여기는 왜 왔어!" 호통을 치더란다. '그래서 그냥 맛있는 거 사 먹고 왔지' 하며 웃는데후광이 비친다.
팔자에 걱정 하나 없는 그분과 용자 대리, 셋이서 밥을 먹으러 갔는데,역시나 용자 대리가 늦게까지 집을 치우고 자느라 아침에 머리도 못 말렸다고 하소연을 시작한다. 어린애가 둘인데 얼마 전부터 시누이까지 집에 와 있다는 용자 대리네 집안 사정을온 부서원이 공유한다. '오늘은 우리 차례구나' 하는데 그분에게서 주옥같은 솔루션이 쏟아진다.
그분: 졸리면 그냥 자면 되지, 뭘 그렇게 늦게까지 치워.
용자: 어떻게 자요, 바닥에 옷이랑 가방이랑 뭐 난리야. 아니 어떻게 온 집안에서 나 혼자 치우냐고.
그분: 응, 그러면 너도 같이 치우지 마.
용자: 내가 안치우면 바닥에 발 디딜 데가 없다니까요.
그분: 그럼 발로 싹싹 밀면서 지나가.
용자: 어휴, 정말 시누이. 옷 좀 어떻게 하지. 이제는 속옷까지 내놓는다니까. 이걸 내가 지금 빨아줘야 되는 거예요?
그분: 빨기 싫으면 다시 시누 방에 갖다 놔.
용자: 아니 방을 무슨 거지 소굴처럼 만들어놨다니까. 자기는 싹 꾸미고 다니면서 방은 어떻게 그러냐고. 방 꼬락서니 볼 때마다 스트레스받아요. 아아.
그분: 그럼 그냥 문을 닫아 놓고 이건 벽이다~ 그래.
용자:... 아니 , 그래도 치우긴 해야 되니까
그분: 치우면서 화내고, 그다음 날 미친것처럼 하고 나오면서 또 화내고, 뭐하러 그래. 그냥 치우지 말고 일찍 자. 설거지도 하지 마. 밥하기 싫으면 사 먹으라 그래. 사 먹기 싫으면 치워 놓으라 그래.
용자:...
그분: 용자야, 안 억울할 정도만 해. 화나기 전까지만 해야지. 화나면 고무장갑 벗어놓고 가서 따듯한 물로 씻고 화장품 많이 바르고 자.
퇴근하고 돌아와 바닥에 붙은 에너지를 긁어 올려서 집안일을 다 해내는 게 최선이 아니라는 것. 어느 정도 잔량이 있어야 빠른 속도로 충전할 수 있지, 완전히 방전되고 나면 충전될 때까지 훨씬 더 오래 걸리니 나를 완전히 방전시키면 안 된다는 것. 사소한 것에 화가 나기 시작하면 이게 방전 직전이라는 신호니까 그대로 두고 바로 쉬어야 한다는 것. 얼마 전에야 깨달은 것들이다.
십 수년 전 난 이미 그분에게 모든 해답을 들었는데도 그때의 용자 대리가 있었을 그 길을 지나 온 오늘에야
그때 그분의 말을 곱씹고 있다.
나는 곧, 그때 그분의 나이가 된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바란다.
나도 그때는, 팔자에 걱정 하나 없는 것이 되어 있기를.
내가 우선이다. 공간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공간을 위해 나를 힘들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
브런치 작가가 되기 위해 쓴 글을 3월 8일 작가가 되자마자 발행하고, 브런치 북에 담으며 수정했습니다.
카카오 뷰에 발행하고 싶은데 '금칙어' 때문에 안된다고 해서, '미친 것'과 '걱정하나 없는 것'으로 수정하여 다시 발행합니다.
제목에서만 금칙어를 뺐더니, 카카오 뷰는 몹시 꼼꼼하네요 ~ 내용에서 네 부분이나 수정했더니. 영 맛이 안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