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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영 Jul 25. 2022

23. 배신


'마지막에 가면,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질 것이다.’

                ㅡ라마나 마하리쉬


 맑고 화창한 날의 하늘은 파랗다. 마음까지도 깨끗해지는 것 같다.

 그 아래로 하얀 구름은 꽃이고 나비이고,또는 새이다.

 초록의 산도, 꽃피는 들도 아름답다. 바람 따라 출렁이는 에매럴드 빛의 바다도 멋지다. 

 보이지도 않는 바람은 또 어디에서 와 상쾌함을 주는지 신기하다.

 이렇게 찬란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더 없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가끔은 악마의 시샘인지 때로는 시원하게 또 때로는 포근하게 불어오던 산들바람이 센바람이 되어 모든 것을 피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맑은 대지에 된바람이 서서히 불어오면 저쪽 하늘에서 화사하던 태양을 뒤로 밀어내고 갑작스레 검은 구름이 성난 얼굴로 다가온다. 이어서 ‘우르릉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을 두 쪽으로 갈라놓을 듯한 섬광이 번쩍인다. 하늘까지도 화난 듯 세찬 비가 대지를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간다.

 갑자기 불어난 황토색의 강물은 덩달아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하다.

 

 마치 평화롭던 한 가정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는 것도 이와 같으리라.

 

『나는 미쳐가고 있다.

 미치지 않고 맨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비정상이다.

 나와 함께 엄마도 미쳐가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엄마는 나에게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보낸다.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고 해도 내가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한다는 것을 진정 모른단 말인가. 

 내 몸의 더러운 피를 몽땅 빼버리고 싶다. 

 그것들을 죽여 버릴 것이다.』


『상감마마,저의 원한을 풀어 주십시오. 제 아비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아비는 제가 평소에 언니라고 부르며 따르던 이웃의 대학생과 바람이 났습니다. 버림받은 엄마와 저는 이 청천벽력과 같은 현실에 정신도 육체도 다 무너졌습니다. 

 지금은 처참하게 산산이 부서진 우리 가정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위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행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모녀의 불행은 영원히 회복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눈물조차도 말라버린 세월을 보내는 우리 곁에서 그것들은 희희낙락 거리고 있는 짐승만도 못한 자들에게 극형을 내려주십시오. 사지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터이니 그보다 더한 벌은 없습니까?

 사방에서 말들이 그것들의 사지를 잡아당긴다.

 딸아, 잘못했어. 이 아빠 좀 살려줘, 아악.

 아빠? 당신이 내 아빠라고? 웃기지 마. 당신과 같은 악마가 내 아빠라니 말도 안 되지. 우리를 지렁이 만도 못하게 짓밟아놓고 살려달라고?

 아, 재미있다. 하하하하.

 나는 웃고 있는데 왜 눈물이 흐르지? 나도 못난 인간이군. 

 꿈이었나?

 환각이었나?

 아무튼 고통스럽게 서서히 죽어가는 꼴을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가슴이 터질 것 같다.분노,저주,복수,그리고 무엇이 있나?

 나는 소리를 질러도,머리를 벽에 박아도 낳아지는 것은 없고 점점 더 가슴이 터져갈 것 같다.

 그런데 엄마는 어떻게 창백한 얼굴로  감금이라도 된 듯 집 안에 갇혀 지낼 뿐 조용할까?

 혹시 그렇게  서서히  죽어가는 것은 아닌가?   죽으면 이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해질 수 있을까?

 행복했던  열다섯의 나는 이렇게 사라지고 마는 것인가?』


 정이는 딸의 낙서를 보자 ‘쿵’하고 무너지는 가슴을 부여안았다.

 나이 사십이 넘도록 고요하고 아름다운 정원에서 오가는 이의 사랑을 받으며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삶이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부모님을 기쁘게 했고, 꿈꾸어 왔던 멋진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남편에 예쁜 딸까지 낳아 키우며 세상은 평화롭고 조용한 행복을 선사했다.

 이렇게 세월은 평화롭게 흘러갈 것이고, 먼 훗날 노년이 되었을 때는 남편과 손잡고 지는 석양도 아름다운 마음으로 바라보리라.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이 이런 것이 구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지?

 아이를 위해서 불덩이가 가슴에 치밀어 올라도 삼키고 있었는데 어떡하지?

 나는 미쳐서 머리 풀고 헤맨다 해도 아이는 안 된다. 한데, 이미 아이는 어쩌면 나보다 더 큰 상처로 아파하고 있고나.

 그렇겠지. 이 세상에 다시없이 사랑하는 아빠였는데 그 배신감을 어린 가슴으로 어찌 감당이 되겠는가.

 길이 없다. 이미 갈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가슴에서 갈고 있던 비수도 이제는 놓아 버렸다.  

 내 인생을 저버릴 것인가.

 아이는? 저 어린아이의 절망과 아픔은 어찌한단 말인가.

 정이는 이미 가버린 남편의 그림자가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밤이면 더욱 숨이 멈출 것 같다.   그래도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마음은 마음뿐이고, 온몸의 세포는 이미 멈춰버린 듯 정신 줄을 놓아가고 있었다.


 해가 지고 주위가 컴컴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방 안에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창문 유리에 빗방울이 흐르는 것도 아는지 모르는지. 

 그때 어디선가 아련히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대로 멍하니 있다가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면서 아이의 방문을 열어제꼍다.

 아이는 침대에 쓰러져 있고 팔은 선혈이 낭자하였다.

 구급차가 가는 대로 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가 눈을 떴다. 

 그리고는 “아빠,보고 싶었어.”하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핏기 없는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이의 아빠는 그곳의 의사였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마지막에 가면 다 괜찮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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