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하던 대로 긴 머리를 다듬어달라고만 할까, 아니면 좀 더 변화를 줘 볼까? 미용실을 갈 때마다 드는 치열한 고민을 두고, 평소의 나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을 했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단발로 해주세요!"
두발 규정이 있었던 중학교 시절 이후로는 한 번도 단발머리를 해본 적이 없다. 가장 큰 이유는 튀는 것을 두려워하는 성격 때문이다. 흔한 단발머리도 내 '무난함'의 기준에서는 어긋났다. 소위 말하는 '망한 머리'에 대한 두려움도 나의 보수적인 스타일에 한몫을 했다. 그래서 웨이브를 넣거나 염색을 하기도 했지만 내 기본 머리는 늘 길게 늘어뜨린 머리, 아니면 하나로 단정하게 묶은 머리였다.
하지만 휴직을 한 상태에서는 어차피 만날 사람도 많지 않으니 없던 용기가 생긴 걸까? 그렇게 서른을 훌쩍 넘겨서야 처음으로 내 의지로 단발머리를 했다. 어깨 위로 짧게 레이어드 커트를 하고, C컬과 S컬을 넣은 웨이브 머리에 뿌리펌과 앞머리 커트까지. 들어올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머리로 미용실을 나섰다. 무겁게 잡아당기던 머리카락들이 짧아지니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그렇게 머리를 자른 나를 보고 남편부터 가족, 친구들까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빈말일지도 모르지만, 하나같이 기분 좋은 말만 해주었다. 잘 잘랐다, 예쁘다, 훨씬 어려 보인다, 여태까지 했던 머리 중에 제일 잘 어울린다, 등등. 생각나는 것을 솔직하게 곧잘 말하시는 아버님이 하신 딱 한 마디에 웃음이 터졌다.
에미야, 자르니까 훨씬 낫다!
사실 온전히 '내 의지'만으로 단발머리를 하게 된 것은 아닐 것이다. 치렁치렁 내려오는 긴 머리가 아기를 안을 때마다 걸리적거렸고, 육퇴(육아 퇴근) 후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은 시간에 머리를 감고 말리는 일이 너무 피곤했다. 어떻게 보면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리듯 단발머리를 했을 것이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하게 된 선택일 것이다.
이 피치 못한 선택 앞에서 왠지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이 들 수도 있다. 긴 머리가 정말이지 너무 좋아서 매일 공들여 가꿔온 사람이라면, 아기 때문에 잘라야만 하는 머리카락 앞에서 괜스레 눈물이 날 수도 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꼭 육아 때문이 아니더라도, 100프로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선택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엄마로서 하게 된 모든 선택들을 아기 '때문에'가 아니라 '덕분에'라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평생 긴 머리였던 내가 머리를 자른 것도, 치마를 즐겨 입던 내가 편한 바지를 입는 것도, 칼질도 제대로 못하던 내가 이유식을 만들기 위해 요리를 시작한 것도, 관절이 약해 무거운 것은 무조건 피해 다니던 내가 아기띠를 메고 문센(문화 센터)를 가는 것도, 글쓰기를 다시 시작한 것도, 모두 다 우리 아기 덕분에 선택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들 덕분에 나는 매일 '새로운 나'를 발견해 가는 중이다. 단발머리에 바지가 잘 어울리는 나, 요리가 재미있는 나, 아기를 번쩍 안는 나,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 무엇보다도 '뭐든지 할 수 있는 나'를 알아가고 있다. 그렇게 아기를 낳기 전의 나라면 절대로 할 수 없었을 일들을 해나가면서 왠지 이전보다 '자신감이 생긴 나'도 보게 됐다.
여보가 이렇게 믿음직스러웠던 적이 없어.
매일 아기를 데리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나를 보며 퇴근한 남편은 요즘 이렇게 말한다. 타고난 허약 체질에 몸치, 거기에 더해 유리 멘탈 소유자인 나를 대신해 집안일은 늘 남편이 도맡아 하곤 했는데. 언제나남편의 걱정을 한 몸에 받던 그런 나였는데. 엄마가 되어 아기를 키우다 보니 이런 말도 듣는구나 싶어 감개무량하다.
모두의 건투를 빈다. 결국 여러분은, 내 후배들은 '육아'로 더 성장하고, 더 멋진 사람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