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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이 Hay Oct 27. 2022

노마드의 시작

외딴 세상,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길목

관광이 아닌 뭔가 색다른 체험을 하고 싶어서 여행지로 한국인에게 다소 생소한 몽골이란 나라를 선택하고 자원봉사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수도인 울란바토르의 한 호스텔에서 같이 묵었던 호주 친구 한 명이 전화번호를 하나 건네며 전화해보라고 했다. 아낙 랜치(Anak Ranch: 목장)라고 여행책자인 론리플래닛에 나와 자원봉사를 하는 여행자들에게 꽤 유명한 곳이 됐다고 했다.

‘민지’라는 목장 주인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어 그곳에서 자원봉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더니 조금 당황한 어투로 일거리는 늘 있으니 오라고 했다―당시엔 자원봉사하는 네트워크를 전혀 알지 못했기에 정식으로 신청하지 못했고, 그에 당황했음이 분명했다.


짐을 챙겨 호스텔에서 나와 기차를 타고 오르콘(Orhon: 러시아 인근, 몽골 북쪽에 위치한 도시)에 도착했다. 기차를 같이 타고 온 몽골 남자 한 명이 손가락으로 어딜 가리키며 민지 저기 있다고 누군가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작은 마을이라 백인과 결혼해서 목장을 운영하고 있는 민지는 이 지역에서 꽤나 유명한 모양이었다.


목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7명의 자원봉사자가 있었다. 그중 세 명이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주방에 들어가 보니 여자들의 키가 각각 187cm, 186cm, 179cm의 큰 키라 흡사 내가 난쟁이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4명의 자원봉사자와 민지, 그리고 마틴(Martin)이라는 남자 주인과 함께 총 10명이 한 테이블에서 같이 저녁식사를 했다.


날이 추워져서 그런지 집안으로 파리가 많이 들어왔다. 내가 밥을 먹는 내내 파리를 쫓는데 신경 쓰자 마틴이 주걱으로 탁 내리쳤고, 그 바람에 산산이 부서진 파리 사체의 파편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파편이 누구의 밥그릇에 튀어 들어갔는지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모두들 밥 먹는 데만 열중했다.

설거지는 신참의 몫이래서 당일 도착한 내가 했는데 아궁이에 걸린 솥을 포함한 10명분의 설거지거리를 수돗물 없이 해내기가 쉽지 않았다. 흐르는 물을 사용하지 않고 물을 끓여서 설거지하는 것도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다른 한 명의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한 시간에 걸친 설거지를 겨우 마쳤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물통에 채워 넣는 건 일과 외의 자율 활동이다.


모두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는 게 이상했지만, 여기서 제일 이상한 사람은 나였다. 그때 나는 나의 안전지대(safety zone)에서 벗어난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고, 그것들이 얼굴에 나타날까 봐 계속 신경 쓰였다.

일과가 끝나고 하나둘씩 자연스레 세면을 하러 가는데 나 홀로 넋 나간 표정으로 담배만 피우고 있었으니 나 자신이 참 한심해 보였다. 찬물로 씻을 엄두가 나질 않아 침대를 찾아 침구를 정리하고 오르니 침대가 흔들거려 떨어질까 덜컥 겁이 났다. 삐걱거리는 침대에서 한참을 뒤척이다 새벽 즈음에야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은 식사 담당이라 부엌에서 종일 시간을 보냈는데 아침 준비하고 설거지하고, 점심 준비하고 정리하고, 저녁을 준비하다 보니 하루가 다 갔다. 삼시 세 끼를 찍는 기분이었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보니 밤하늘의 별들이 코앞에 있는 듯 가깝게 느껴졌다. 뭔가에 홀린 듯 한참을 바라보는데 유성이 꼬리를 물고 떨어졌다. 불과 100미터 앞에 있는 듯 가까이서 펼쳐진 별들의 향연은 오늘의 노고에 대한 보상이었다. 열악한 환경에서의 목장일은 간혹 머리가 하얘질 때는 있어도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다. 다들 지친 표정으로 그다지 단순노동을 즐기는 것 같진 않았지만 어느 누구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지금은 척박한 땅 몽골에 적응하는 시기였다. 이틀 만에 완벽히 그들과 같은 모습이 됐다.


민지가 양치는 일을 해보겠냐고 해서 냉큼 하겠다고 했다. 드디어 나도 몽골에서 말을 타보는구나 싶었다.

양과 염소들을 데리고 나가 풀도 먹이고 너무 멀리 흩어지지 않게 돌보는 일이었는데 이날 바람이 불면서 비가 오기 시작했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진 대지 위를 적시는 비가 마치 천국에서 내려온 생명수인 듯 느껴졌다. 자잘하게 자란 풀이라도 뜯어먹으려는 양 떼가 안타까웠는데 내일은 이 생명수를 먹고 자란 풀이 가축들의 먹이가 될 거란 생각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이 위대한 자연은 더럽혀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지평선이 보이는 평야를 산책하듯 양을 치는 일은 정말 자유로웠다.


돌아와서는 게르(Ger: 몽골 유목민들이 가축을 이동시키며 짓는 간이식 천막)에서의 밤을 준비했다. 들에 풀어놓은 소들이 있어 번갈아가면서 밤새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게르에서의 새벽은 추웠다. 풀 덩이처럼 보이는 소똥을 주워다가 모아 태웠는데 화력은 좋지만 금방 꺼져 새벽이 되니 그야말로 얼음덩이가 품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아서 잠을 잘 못 이루었다. 게다가 오도독거리며 짐승이 뭔가를 씹는 소리가 계속 나서 신경이 곤두섰다.

'늑대인가?'

나중에 알고 보니 풀어놓은 소였다.

아침이 다된 늦은 새벽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와 바닥에서 자다가 나간 일이 있었는데 민지가 설명해주길, 몽골에선 낯선 이가 게르에 들어와도 별다른 의구심 없이 더운 차와 잠자리를 제공하는 전통이 있다고 했다. 몽골의 혹독한 추위를 감안한 나름의 생존 방식인 듯했다.


아침에는 송아지들이 배고프다며 울어대는 소리가 대단했다. 송아지를 풀어놓으면 어미에게 찾아가는데 젖을 문 송아지를 어미에게서 떼어내고 우유를 적당량 받은 뒤 다시 송아지에게 어미젖을 물린다. 그냥 짜면 젖이 나오질 않는다. 받아낸 우유의 소량을 대지에 뿌리며 대지의 신에게 감사하는 모습이 왠지 성스럽게 보였다.


1년이 된 망아지에 인장을 찍는 날이 있었다. 망아지를 땅에 뉘어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망아지가 힘이 너무 세서 열 마리 남짓 인장을 찍고 나니 탈진이 됐다.

이날은 농사를 짓지 않는 몽골인에게 추수감사절과 같은 의미가 있다. 우리는 보드카를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대지가 준 것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잔을 받으면 손가락으로 술을 좌우로 튕기고 그다음 잔을 비운다. 자연의 순리를 지키며 사는 이들이 지혜로워 보였다.

술이 어느 정도 돌고 마틴이 어떻게 몽골에 오게 되었는지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노마드 라이프를 동경해서 몽골에 정착했다고 얘기하는 마틴의 눈이 그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는 듯 몽롱해졌다.

별을 사랑하고, 말을 타고 질주하는 그림을 꿈꾸며 몽골에 왔다는 이 꼬장꼬장한 욕쟁이 꼰대가 내가 머릿속으로만 바라던 삶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란 걸 그때 알았다. 알고 보면 예민한 감성과 조금은 쓸쓸한 눈빛을 가진 정 많은 사람이었다. 낙마로 인해 골반뼈 골절로 더 이상 말을 못 타지만 언젠가는 스탈리온(Stallion: 종마)을 타고 초원을 달릴 거라고 눈을 반짝였다.

2주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이후 몇 번의 자원봉사와 홈스테이를 하면서 한 달 조금 넘게 다른 지역들을 돌아다녔는데, 아낙 랜치에서 있던 2주 동안 몽골에서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체험을 이미 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또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꿨다는 것도.


몽골을 떠나기 전에 다시 아낙 랜치를 방문했다. 이것저것 재료가 없음을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만들지 못한 김치를 담가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였다.

이제 작별이다. 하지만 늘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품어본다.


아낙 랜치에서 이틀 정도 머물고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온 후, 나는 주변을 정리하고 장기여행을 준비했다. 자원봉사 네트워크(Workaway)에 등록하고 1년 동안 한국에서 자원봉사하다 이듬해 한국을 떠났다.


아마도 이것이 내가 난생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삶에서 벗어나 스스로 뭐가 좋고 싫은지를 판단하기 시작한 때였던 것 같다.


마틴의 부고를 들은 건 그 1년쯤 뒤였다.


목장 내 우물.
양치는 일은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양과 염소는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다 알고 있어서 시간내에 무리지어 풀을 뜯고 돌아와 목장안으로 알아서 들어갔다.
게르(몽골식 이동캠프) 안. 디아나라는 이 자원봉사자는 나에게 처음 말 달리는 법(gallop)과 장노출로 별을 찍는 법을 알려준 친구다.
말에 인장 찍는 날은 다른 나라의 추수감사절처럼 수확의 감사와 기쁨을 잔치하는 날이다.
부엌에서의 전경은 늘 실험적인 것들로 가득하다. 모두에게 익숙하지 않은 조리시설은 그들에게 도전의식을 고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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