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자리 잡고 앉아서 션파와 이야기를 하던 중,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네가 일 이야기, 애 이야기 말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바다, 커피잔, 지나가는 사람들을 봤으면 좋겠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눈앞에 보이는 것을 보다가 떠오르는 생각을 말해도 좋고, 아무 생각이 안 나면 멍 때리고 있어도 좋아."
이 말에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션파가 보기에는 여전히 내가 이 시간에 이 장소를 '온전히 즐긴다'기 보다 나의 '의식 저변에 여러 생각이 부유'한다고 느꼈나 보다.
아마 평소에 이 말을 들었다면 그냥 흘려 들었거나, 아니라고 변명을 했을 텐데, 낯선 공간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나 자신을 제대로 보게 된다.
꽤 오래전인 션이 4,5학년 무렵 고객사 TFT에 지원 나가서 몇 개월 도와준 적이 있다.
원래도 일중독 기질이 있었지만 그때는 어쩐 일인지 그 정도가 상당히 심한 적이 있었다. 일의 의무감, 책임감, 성취 이런 게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나를 '영혼 없는 일 무덤' 속으로 계속 매몰시켰다. 그렇지 않아도 일에 잘 빠지는 타입인데 그때는 영혼의 한 조각까지 탈탈 털어서 일에 매달렸고, 아무리 일을 많이 하고 잘 해도 아무런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
다행인 점은 TFT 기간은 대략 5개월 정도였고, 나 스스로를 몰아붙인 기간은 그중 한 달이었었다.
돌이켜 생각해도 그 당시 왜 그렇게 내가 나를 못살게 굴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업무 강도 심한 것만으로는 그리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는다. 훨씬 긴 기간 동안 업무 강도가 심한 적도 많았지만 꽤 즐겁게 일해왔기 때문이다.
얼마나 정신적으로 힘들었던지 몸에도 영향을 미쳐서, 어린 션이 보고 '엄마 살 좀 쪄야겠다.' 할 정도로 짧은 기간 체중도 지나치게 줄었었다. 그때 션파가 이상 징후를 감지하고 나를 끄집어 내어 주었다.
그 일이 적당히 마무리되고 일이 소강상태였을 때 맞춰서 션파가 강하게 밀어붙여서 가족여행으로 유럽으로 훌쩍 떠나게 된 것이다. 여행 첫 주 차는 내내 일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가 여행 2주 차가 되어서야 내 마음이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았었다. 션파가 끄집어 내준 것은 TFT에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서였다.
당시 여행에서 깨달은 바가 워낙 커서 돌아왔을 때 내면에 큰 변화가 있었다.
나를 객관적으로 보기도 했고, 나의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기도 했다.
완벽주의와 책임감이 과하게 결부될 경우 오는 부작용에 대해서 제대로 깨달았다. 어쩌면 그때까지 20여 년 넘게 누적되어온 업무와 육아 강도가 한계까지 도달했던 것일지도..
이때부터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재작년 제주의 반쪽 1년 살이도 '치유'의 기간이었다.
이 기간도 일이 적지는 않았으나, 마음만 먹으면 가까운 거리에 바다와 오름이 있고 하늘과 땅이 시야를 가득 매운 공간을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자 행복인지를 시간이 갈수록 느꼈다. 1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동안 내가 얼마나 나의 에너지를 끌어다 썼고 아직도 채울 빈 공간이 많은 지도 알았다.
새벽 달리기를 하면서 하늘이 예쁜 색으로 물들 때, 경험하지 못한 낯선 곳에 갔을 때 '지금 이 순간'을 느꼈고 내가 '이곳'에 있음을 감사했다. 그때마다 머리가 깨끗하게 비워졌었다.
미케비치의 바다는 우리나라 동해안과 푸른색이 왠지 닮았다.
익숙한 바다색 때문이었을까 제주의 경험 때문이었을까, 션파가 이렇게 콕 찍어서 말해 주지 않았다면, 나의 의식이 '지금 이 순간 이곳에'에 완전한 모습으로 있지 않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션파는, 자꾸 무언가를 하려 들지 말고 때로는 머리를 비우고 그냥 눈길 가는 대로, 발길 가는 대로 둬보라고 했다.
나 같은 타입은 처음에는 연습이 필요할 거라며, 책도 핸드폰도 보지 말고 일과 아이 이야기도 하지 말고 그냥 멍하게 있는 연습을 해 보라고 했다.
항상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차를 타고 갈 때나 이렇게 낯선 곳에 올 때 한적한 거리가 나오면 바깥 풍경을 아무 생각 없이 보라고 말한다. 뇌도 좀 쉬어야 하는데, 너는 너무 부지런한 게 탈이라며.
또다시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오른다.
지금까지 읽은 책 중, 갈수록 가장 많이 생각나고 가장 많이 떠오르는 책 중 하나가 <그리스인 조르바>일 것이다.
'현존'을 즐기라는 션파의 말이 무슨 뜻인지, 갑자기 번개를 맞은 양 이해가 되었던 날이었다.
참 현명한 사람이다. 션파는.
시기적절할 때 예방주사를 놔준다.
(책을 읽지도 않는 사람이 책과 같은 이야기를 할 때면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미케비치에서 나눈 대화 덕분에 나를 다시 '객관적'으로 돌이켜 보게 되었다. 잠시 미래의 나의 모습도 그려보았다. 그 결과 향후 일의 방향도 어느 정도 구체화시켰고, <미니 은퇴>에 대한 강렬한 욕심도 생겼다. 꿈이 자꾸만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