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育兒)에서 육아(育我)까지
워킹맘 아들 스탠퍼드 입학하다
아이를 키우는 것을 '육아'라고 한다. 한자로는 기를 육(育), 아이 (兒)를 사용한다.
아이가 없으면 모를까 우리 인생에 아이가 생기면 이 아이가 독립을 할 때 까지 각자만의 방식으로 육아를 한다.
'우리는 아이를 방목해요,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둬야죠.' 유형도 봤고, '부모가 되었으니 책임감 있게 대해줘야죠. 지나친 간섭은 해가 되겠지만 적당한 개입과 훈육은 필요해요' 라고 말하는 유형도 봤다.
가정분위기와 가족들의 기질에 따라 잘 맞는 방법이 있을 테고, 각자만의 방식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으리라 여긴다.
얼마전 웹툰을 보다가 아래와 같은 글을 보았다.
"원래 부모란 그런 것이지요.
한없이 사랑하고 아이를 믿으면서도
아이가 남에게 폐를 끼치진 않을까,
밖에 나가서 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늘 노심초사하는..."
어찌나 공감이 가던지. 아이가 철이 들기 전까지는 밖에서 실수를 하지는 않을 지, 폐를 끼치지 않을지 걱정될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는 '이것도 나의 욕심인가' 했었다. 남에게 보이는 시선에 신경을 써서 아이가 완벽하게 보이고자 하는 욕심말이다.
아이들이 바깥에서 하는 행동을 바라보는 시선 중 '부모 잘못이다'라는 말이 하곤한다. 이 말 역시 공감을 하면서도 저중 에서 분명히 노력하고 애쓴 부모님들도 많을 텐데 자신의 뜻과 의지와 상관없이 아이들이 그릇된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사랑은 충만하되 아이를 대하는 방법을 잘 몰랐었을 수도 있다.
비록 아이 하나밖에 키우지 않았으나 육아를 통해 아이도 사람이므로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나의 시선'이 아니라 '아이의 입장'에서 보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타인을 대할 때 적정한 경계가 있었을 텐데 아이를 대하면서 그런 경계가 허물어졌고 '그럴 수 있겠구나'를 끊임없이 깨달았다.
아이가 어릴 때는 부모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생존이 걸려 있으니까. 그래서 사랑과 관심으로 아이를 돌봐야 한다. 그러다 아이가 자랄 수록 부모도 방목형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가 정신적으로 독립을 할 준비를 해서 사회에 홀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초반에 말한 방목형, 관심형 다 맞는 말이지만, 부모가 한가지 유형으로 머물게 되면, 특정 시기가 되면 아이와 부딪치게 마련이다.
부모가 방목형으로 서서히 바뀌어야 할 무렵 아이에게 주로 하는 말이 '이러저러 해야 한다, 했으면 좋겠다.' 등이다. 주로 교육과 태도에 관한 것으로 아이에게는 잔소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중요한 시기여서 아이가 열심히 해야 할 때 같은데 부모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행동이 보이고 말도 반항기가 서려있다.
친구와 비교는 좋지 않다고 하니, 입시 신화를 이룬 어떤 가상의 선배 예시를 말하기도 하고 실리콘 밸리의 성공담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때 든 생각은 '나도 못하는 걸 이 아이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였다.
오늘 배운 것을 복습하고 내일 학교에 가져갈 준비물을 알아서 챙기고 방안도 정리정돈 잘 해줬으면, 말도 배려심있게 하고 친구들에게는 리더십을 가져줬으면, 욕심있게 꿈을 꾸고 이를 차근차근 실천해 줬으면..
그렇다면 과연 부모인 나는 그렇게 하고 있나?
내 주변 사람들에게 배려심있게 행동하고, 오늘 일하고 돌아와서 몸이 지치더라도 가사일도 말끔히 하고 자기 관리도 하며 심지어 내일 출근준비, 식사준비 깔끔하게 하고 자나?
그리고 꿈을 가지고 자기개발을 하며 살고 있나?
아직도 신체적인 성장, 정신적인 성장을 하고 있는 아이에게 '완벽'을 요하는 실수를 하는 것이 부모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선배의 성공담, 실리콘 밸리의 성공담보다 부모인 나부터 성실히 바르게 산다면 아이에게 충분히 일상에서 좋은 롤모델이 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아이가 책을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면 나부터 책을 읽고,
아이가 일찍 일어나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면 나부터 일찍 일어나며,
아이가 예의바르게 행동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면 나부터 아이를 존중해주고,
아이가 아빠와 대화를 하기를 바란다면 나부터 남편을 존중해 주는 모습을 보여주고,
아이가 꿈을 가지기를 바라면 내 꿈부터 찾는 것이 맞아 보였다.
그렇게 서서히 '아이(兒)를 기르는 것'이 아닌 '나(我)를 기르는 것'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아이가 독립을 하는 것으로 보는 대학에 입학할 무렵까지가 육아의 끝으로 보았다.
그런데 육아(育兒)에서 육아(育我)로 생각이 바뀌고 나니 내 인생 전체가 육아(育我)였다.
내 아들이 지금은 성공한 누군가를 쫓는 삶을 살더라도, 앞으로 중년, 노년이 되었을 때 가끔 엄마와 아빠의 인생을 곰씹으며 '나도 저 모습과 닮았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 오늘 하루를 허투로 보내지 않으며 소소한 행복을 깨달으며 사는 것이 '나를 기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아이를 기르면서 온전히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고, 그 끝에는 부모의 희생이 아니라 비로소 '나를 이해하는 내'가 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