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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지 Jun 04. 2022

나의 인생은 3대를 거쳐가는 것은 아닌지

직장맘의 육아일기

요즘은 결혼이나 출산을 꼭 해야 하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내가 20대까지만 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이었다.

여자는 20대 중반, 남자는 20대 중후반 결혼을 하지 않으면 바로 노총각, 노처녀 소리를 들었고 어떤 행동을 하면 그 사람의 성향과 기질에 대한 이해를 하기보다 노총각/노처녀 히스테리로 보았다.

혹여 비혼으로 살 경우, 사회적인 색안경은 상당했다. 어딘가 문제 있는 거 아닌가 하는..


그리고 결혼을 하고 나서도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이내 가족, 친지들의 걱정으로 이어졌고 매 명절마다 '언제 가질 거냐, 빨리 가져라' 등의 말이 쉽게 오갔다. 아이가 하나 있다면 외로우니 빨리 하나 더 가져라, 혹여 딸이라면 아들이 있어야 든든하지 등.

여자가 일을 한다고 하면, 집에서 남편 내조 잘하고 아이 잘 키워야지 벌면 얼마나 번다고의 통념도 강했다.


그렇다고 남자들이라고 편하지는 않았다. 가부장적 성향,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이 많긴 했으나 워낙 상하 분명한 사회였다 보니 그 무게감에 짓눌려 사는 경우가 많았고 집에서는 내색을 하지 않고 가정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다.


어쩌면 나의 부모세대는 자신의 인생 설계를 사회가 이미 정해 놓은 것 같기도 했다.

이때 결혼해야 하고, 이때 여자는 집, 남자는 일을 해야 하고, 아이는 몇 명이상 낳아야 하고, 이때 은퇴해야 하고..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참 많이 좋아졌다고 본다. 새로운 부작용이 생기기도 했으나, 개인의 자유가 많이 존중되고 사회가 정한 인생 설계에서 벗어나 자신이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남의 눈치, 사회의 눈치를 보느라 그저 참고 사는 게 미덕이었던 우리 부모님들과 달리, 지금은 그래도 사회 곳곳에서 아닌 것은 아니다는 말은 하고 있다.


내가 결혼한 나이가 27살이었다. 그 당시 통념상 노처녀의 경계에 해당했다. 그리고 출산을 했을 때가 30살이었다. 당시 노산에 해당했다.

초등학생일 때는 중학생이 되었을 때, 중학생일 때는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고등학생이었을 때는 대학생이 되었을 때 엄청난 변화를 느꼈다. 나름 학생 신분이 바뀔 때 변화는 2배씩 증가했던 것 같다.


그러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니, 학생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고 내가 겪어야 할 무게도 엄청났다.

그래도 경제적 독립도 하고, 연애도 하고, 일에 성취감도 가지면서 즐거움이 더 많았다.

결혼을 하니 이제부터 책임감이 더해졌다. 둘만의 꽁냥 거림이 아니라 집안의 대소사, 제사, 명절, 집안일 등 갑자기 해야 할 일이 두배는 늘었다.

그래도 금세 적응이 된다. 몰랐던 바도 아니고 새로운 관계에서 오는 새로운 즐거움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고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제부터는 슈퍼 초 샤이언인이 되어야 했다. 심지어 내가 아파서도 안되었다. 맞벌이면서 큰집이다 보니 가족 모두 각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서로 도와가며 아이를 키우는데 한 명이 아프면 이 균형이 깨어질 판이다. 그래도 아이를 '인화초'라고 했던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내가 어릴 때 친정아빠가 자식들 얼굴만 봐도 피곤이 사라진다고 하셨을 때 이해가 가질 않았는데, 막상 내가 아이를 키워보니 밤을 새우고 와도 아이 얼굴 쳐다보면 이런 피로회복제가 따로 없다.


그렇게 아이 키우면서, 내가 '참인간'이 되어감을 느꼈다.

아이가 7살이 되면서 나의 7살로 돌아가 부모님의 심정이 이랬겠구나를 알게 되었고,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서 나의 초등학교 시절로 날아가 그때 얼마나 어렸는지 어떤 꿈을 꾸었는지 회상했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자, 나의 중학교 때 점차 넓혀졌던 친구관계와 그 속에서 희로애락들이 기억났고,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자,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가 떠올랐다.

이제 아이가 성인이 되니, 대학교 1학년 때가 선명해진다.


아이의 나이에 따라, 나의 과거와 현재의 내가 오버랩되며 점차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 션이 자신이 엄마 사회생활하는 데 발목 잡은 건 아닌가 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이야기해 준 말이 있다.


나는 지금까지 션 키우면서 일을 놓쳐본 적이 없고, 가족의 일원으로 해야 할 일, 예를 들어 제사나 명절에 맏며느리로써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프로젝트 컷오버를 앞두고 몇 달을 야근을 하다 명절에 비상대기를 할 때도 잠시라도 집에 들러 차례를 지내고 돌아왔다. 함께 밤을 새우던 동료들은 그 시간 차라리 눈을 붙이라고 했으나, 설거지라도 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물론 일에서는 야망을 가지고 사회적인 성공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적이 있었을지 모르고, 여느 집 며느리들처럼 솜씨 있는 집안일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일은 계속해왔고 그때그때 시기마다 우선순위가 높은 일에 집중했다.

션에게 좀 더 집중하기 위해 사회에서 내가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을지 몰라도 그건 절대 션을 위한 '희생'이 아니었다. 내가 진심으로 '좋아서' 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션이 내 발목 잡은 적은 없었고 오히려 엄마가 사회생활할 때 큰 원동력이 되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자식이 반듯하게 자라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느 부모나 같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 부모 마음대로 되나. 아이가 인형도 아닌데.


아이 키우며 이 아이를 이해하려고 하니 끊임없는 관심과 관찰이 필요한데,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들여다 보기도 하고, 저 아이는 어떤 사람인가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게다가 아이는 한 살, 두 살 먹어가며 계속 바뀐다. 10년 전 션과, 5년 전 션, 그리고 오늘의 션은 다 다른 사람 같다.

그렇게 한 명을 온전히 이해하려 하다 보니, 그리고 최대한 관대하게 마음먹으려 애쓰다 보니 세상 모든 사람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이상한 행동이 언제부터인가 '그럴 수 있겠구나'로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아이를 키우다가 부모의 입장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다 보면 또 다른 모습이 보인다.

사회에서 높은 지위, 엄청난 부, 많은 명망을 가지고 계신 분들 중 자식 앞에서 고개를 숙이시는 경우가 많았다.

존경받아 마땅한 분들이 자식 앞에서 약해지고 가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함께 짠해진다.

한때 젊은 혈기로 함께 일했던 분들이 은퇴 전후 시기가 되면서 아이들이 대학생, 직장인이 되면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역시나 자식 걱정이 많다.


이전에는 동창모임을 가서 비싼 외제차를 타고 와서 번듯한 명함 돌리고 거한 후원금 내던 분들이 부러움 대상이었다면, 나이가 들면서는 자식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따라 부러움 대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어찌 보면 내 인생과 자식 인생은 서로 다른데 왜 이리도 우리 마음 한 구석에는 자식의 방을 치우지 못할까.

션을 키우면서, 나와 션의 인생을 분리시키는 연습 꽤 했다. 엄마 욕심이나 엄마 과시로 인해 아이를 힘들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혹시나 욕심나는 일이 있을 때는 차라리 일에 매진했다. 션의 성공은 내 성공이 아니며, 션의 실패는 나의 실패가 아니다. 나의 성취는 나의 일터에서 누리면 되고, 나는 부모로서 션을 격려하고 칭찬해 주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과 육아에서 균형을 맞추려 참으로 애썼다.


그러면서 어느 날 김형석 교수님의 <백 년을 살아보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인생'을 50이 되기 전에 평가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자녀를 키울 때도 이 애들이 50쯤 되면 어떤 인간으로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내 인생은 내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의 정신적 유산은 나의 자식에게 까지 이어지고, 다시 그 자식에게 이어진다.

나 혼자만의 성공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런 삶은 자식에게 물려줄 것은 재산밖에 없을 것 같아서다.


내가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내가 바라는 인생을 완성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 까. 내가 바라는 인생은 최소 3대를 거쳐야 완성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존경을 받는 삶.

이 삶을, 주먹으로 태어난 내가 일평생 동안 이루는 것은 그리 쉽지가 않다. 겨우 중년이 넘어서야 철이 들기 시작해서 자신이 걸어온 삶을 돌아보고 좀 더 열심히 살껄하고 후회를 한다. 그래서 자식에게는 더 많은 기회를 주려는 것은 아닐까. 나의 한풀이, 나의 대리만족이 아니라 내가 꿈꿔온 삶을 내 생애에서 이루기에는 힘들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내 인생의 길이를 나의 죽음까지가 아니라, 내 자식과 내 손자까지라고 생각한다.


성실하고 긍정적인 소시민의 삶을 아이에게 보여 주되, 좋은 생각, 좋은 가치관을 가지도록 해 준다면

내 아이가 살면서 또 아이를 낳으면서 나처럼 자신의 어린 시절을 통해 엄마와 아빠가 했던 말들을 곱씹어 볼 것이다. 그렇게 나의 유전자가 좀 더 내가 원하는 삶으로 다가가리라 여겨진다.


그러려면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박차고 나갈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자란 분위기, 환경, 사회와 비슷한 곳에서 내 아이가 자란다면 나와 비슷한 삶을 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내가 꿈꿔온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아이를 보내야 그 속에서 직접 보고 깨닫는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션이 많은 지극과 많은 배움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애를 많이 썼다.


내 인생의 완성이 나의 손자이듯, 션 인생의 완성은 션의 손자에 이를 것으로 본다.

결국, 우리 인생에서 '자식농사'가 중요한 이유다.

그래서 그저 내 자식이 명문대, 좋은 학과, 좋은 직장을 가졌으면이라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지 계속 생각했던 것 같다.


션에게 항상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성공하고 싶다면 아예 세상을 향해 거하게 베풀 수 있는 사람 되자'라고 말하고,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의 나는 부족한 면이 많다.

아마 내 목숨 다하는 날까지 나는 부족할 것이다.


그래도 내가 션에게 주고 싶은 정신적 유산은 바로 저런 것이다.

션이 그 유산을 조금이라도 물려받았다면 션이 아이를 낳을 때 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손자에서, 그리고 션의 손자에서, 손자의 손자에서 언젠가 그 유산이 뜻을 이루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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