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취미생활 (1)

언어를 배운다는 건

by 슈리엘 아샬라크

언어는 늘 멀고 어려운 존재였다. 학창 시절의 영어는 언제나 시험과 성적을 위해 존재했고, 그 언어가 실제 삶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시험지를 채우는 데는 요긴했지만, 내 입술을 떠나 누군가에게 닿은 적은 없었다. 단어를 외워도 금세 잊혔고, 문법 문제는 마치 수학 문제처럼 규칙과 답만 있을 뿐 생생한 사람의 숨결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래서 언어 공부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처럼만 느껴졌고, 늘 지루하고 무의미한 숙제였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영어를 못한다. 오죽하면 학교 일을 하던 시기, 영어 선생님이 나를 두고 ‘한국식 교육의 폐해’라고 표현했을까. 그 말이 부끄럽기보다는 오히려 씁쓸한 자조로 다가왔다. 언어는 늘 어렵고 지루한 것처럼만 느껴졌고, 나와는 평생 거리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언어는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을 잇는 다리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일본어를 배우는 수업이 있었다. 처음엔 호기심이 일었지만, 그저 새로운 글자를 그림처럼 구경하는 정도였지 큰 의욕은 없었다. 첫 수업에서 배운 것은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정도였다. 직장인 생활을 하면서도 일본어 학원에 잠깐 다닌 적이 있었지만, 퇴근 후 쏟아지는 피로 앞에서는 몇 장의 교재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결국 히라가나만 간신히 익혔고, 지금도 가타카나는 그다지 알지 못한다. 그 무심한 배움이 훗날 내 삶을 열어 줄 줄은, 그때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통로가 있었다. 바로 애니메이션이었다. 자막을 따라가며 보던 애니메이션 속에서 귀에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표현들이 어느새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아리가또우”라는 짧은 고마움의 표현이나, 감탄사처럼 튀어나오는 일상의 말들이 조금씩 마음에 쌓였다. 어느 날은 자막이 없었는데도 눈치채지 못하고 초반부를 다 본 적도 있었다. 책장 앞에서 억지로 외우려 할 때는 도무지 남지 않던 단어들이, 재미와 호기심 속에서는 자연스레 익혀졌다. 대강의 흐름은 귀로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언어는 책상 위에서가 아니라, 내 귀와 가슴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하루는 일본어 학원에서 둥근 원 탁자에 앉아 졸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기습적으로 일본어를 써서 질문을 던졌다. 당시 정세와 관련 있는 질문이었다. 조만간 북한에서 쳐들어 올 수도 있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졸린 눈을 간신히 추스르고 일본어로 대답했다. “이제까지 잘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전쟁이라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대답에 옆에 있던 남자 수강생이 선생님께 말했다. “저 사람 왜 저기 있는 거예요? 일본인인 줄 알았네.” 순간 모두가 웃었지만, 나로서는 뜻밖의 칭찬 같아 그날따라 졸음이 싹 달아났다. 언어가 작은 오해와 웃음을 동시에 불러오는 순간이었다.


일본어의 작은 발휘는 여행지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물건을 찾으며 망설이는 지인들 앞에서 내가 나서 점원에게 질문했고, 길을 묻거나 낯선 일본인의 이야기에도 완벽하진 않지만 대답을 찾을 수 있었다. 여전히 서툴고 부정확했지만, 상대방이 알아들어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웠다. 무엇보다 일본인들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공부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능숙하게 말하냐. 애니메이션 본다고 일본어가 그 정도로 배워지나.” 놀라워하는 그 말속에 언어의 신비가 담겨 있었다. 언어라는 게 이렇게 일상 속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구나, 그때 처음 실감했다.


그 경험은 또 다른 인연으로 이어졌다. 소개를 받는 등의 결과로 일본인 친구를 사귀면서, 언어는 더 이상 시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문이라는 걸 몸으로 알게 되었다. 히라가나 하나만으로 연결된 열린 문은 생각보다 훨씬 넓고 따뜻했다. 언어는 눈으로 외우는 글자가 아니라, 마음으로 열리는 문이었다.


일본어 경험이 취미와 우연에서 비롯되었다면, 러시아어와의 만남은 필요와 책임에서 출발했다. 병원 안내 일을 할 때, 러시아인 환자들이 자주 찾아왔다. 처음에는 손짓과 몸짓으로 설명을 했지만, 중요한 내용을 전달해야 할 때마다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문법이나 문장 구조를 깊이 파고들 여유는 없었지만, 안내에 꼭 필요한 몇 마디를 외워 두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조심하세요.”, “살펴 가세요.”, “조금밖에 말할 줄 모릅니다.”, “저기”, “실례합니다만”, “함께 갑시다”, “접수, 수납” 같은 표현들이었다. 짧은 말이었지만, 낯선 얼굴을 맞이하는 순간 필요한 최소한의 다리였다.


어플을 받아 원어민 발음을 따라 하며 외웠다. 몇 번 반복해서 읽으니 머릿속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러시아인 환자의 질문에 러시아어로 답해 주었다. 그러자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간단한 말 한마디였지만, 그들에게는 큰 위로이자 배려로 다가간 듯했다. 순간 깨달았다. 언어는 완벽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마음 그 자체라는 사실을. 짧은 단어 몇 개가 낯선 땅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덜어 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언어의 힘이었다. 나는 이 짧은 러시아어 덕분에 병원에서는 물론, 일상에서도 러시아인 친구 몇 명을 사귈 수 있었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를 넘어, 세계를 확장시키는 창문이기도 했다. 일본어는 나에게 애니메이션과 여행, 그리고 친구라는 인연을 안겨주었다. 러시아어는 병원이라는 일터와 거리에서 낯선 이들과의 간극을 좁혀 주었다. 언어는 곧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문화까지 담고 있었다. 일본어의 섬세한 존칭 표현은 관계 속 거리감을 조율하는 방식을 알려 주었고, 러시아어의 단단한 발음은 강인함과 직설적인 기운을 전해 주었다. 언어를 배우며 나는 이전에 몰랐던 세계의 또 다른 면을 엿보았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언어가 만들어 준 인간관계였다. 일본인 친구와의 교류, 러시아인 환자들의 따뜻한 반응, 지인들이 내 말을 신기해하며 웃어주던 순간들. 모두가 언어 덕분에 생겨난 장면이었다. 유창하게 구사하지 않아도, 단어 몇 개로 웃음을 만들고 마음을 이어갈 수 있었다. 언어는 시험 점수보다, 문법보다, 결국 마음을 잇는 매개체였다. 한마디의 말이 누군가의 마음을 열고, 낯선 세계에 작은 창을 만들어 주었다.


돌아보면, 언어 배우기는 내게 단순한 취미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내가 가진 고독을 넘어 다른 세계와 이어지는 길이었고, 동시에 새로운 나를 빚어내는 과정이었다. 언어는 언제나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 한마디로 상대방을 웃게 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었다. 언어는 취미이자 배움이고, 또 다른 삶을 여는 열쇠였다. 언어를 배운다는 건 결국 나 자신을 새롭게 배우는 일이었다.


앞으로도 나는 언어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갈 것이다. 유창하지 못해도, 또 쉽게 잊어버려도 괜찮다. 중요한 건 그 언어 속에 담긴 마음과 세계를 만나려는 태도일 테니까. 언어는 결국 나와 타인을 이어주는 다리, 내가 아직 만나지 못한 세계로 향하는 창문이다. 언어는 내 삶 속에서 작은 등불처럼 흔들리며, 또 다른 풍경으로 이끌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단어장을 펼치고, 또 다른 언어의 소리를 따라 해 본다. 낯선 음절이 입술에서 굴러 나오고, 내 안의 또 다른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을 기다리면서. 그 끝에서 언젠가 또 다른 미소, 또 다른 인연과 마주할 날을 기대하면서.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