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평 "튜브"
손원평 작가의 <튜브>를 읽고 나니 분명 소설책을 읽었는데 자기계발서를 읽은 기분이다. 왜 나는 김성곤 안드레아의 인생에서 내 삶의 방향이 어느 쪽인지 살펴보며 또 한 번의 다짐을 하게 되는 것일까?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가족에게마저 외면당한 채 자살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김성곤 안드레아는 나약한 패배자로 셀프 낙인을 찍기 직전, 우연히 자신의 구부정한 자세를 보게 된다. 성공은 트램폴린을 타고 점프해서 낚아채듯이 가질 수 없다는 뼈아픈 경험을 하고 난 뒤, 더 이상의 발버둥은 포기하고 그저 단 하나, ‘곧은 등 펴기’를 의미 없는 삶을 이어가기 위한 핑계이자 목표로 삼게 된다.
“허리는 위로. 어깨는 아래로. 등은 그 사이에. Back to the Basic!”
화창한 드라이브 길이 갑자기 뿌연 안개가 쌓이며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가려진 시야에 말할 수 없는 불안감으로 그만 멈출까 고민하지만, 후진도 할 수 없는 고속도로 위에서 혹여나 뒤에서 날 받아 버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비상등 하나 믿고 천천히 나아간다. 이 순간 최선의 선택은 빨리 달려 목적지에 제시간에 도착하는 것보다 안개가 걷힐 때까지 느리더라도 안전하게 전진하는 것이다.
성곤 역시 안개 속 운전자로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전후좌우 살피며 천천히 운전하는 것이 앞만 보며 빠르게 운전하는 것보다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길에 졸음 방지를 위한 대화 상대로 조수석에 한진석이라는 인물을 태우고 달리게 된다.
예전 피자가게 알바생인 한진석은 김성곤에게 조력자 같은 존재이다. 진석은 성곤의 자세 사진도 찍어주고 응원의 말도 해주면서 본인 또한 성곤의 도움으로 잊고 지냈던 꿈을 향해 천천히 전진한다. 확실히 혼자 가는 것보다는 토닥거려주며 같이 가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서로의 결심에 더욱더 확신을 안겨주는 시너지가 된다.
그렇게 천천히 가다 보니 어느새 안개는 걷히고 보이지 않던 앞이 조금씩 시야에 들어온다. 그제서야 전보다 속도를 조금 더 내서 달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하지만 처음 목표 시간에 맞추기 위해 과속을 하진 않는다. 김성곤도 과속보다는 안전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튜브’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있지만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평범한 것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잘 느끼고, 뭐든지 한 번에 한가지씩만 하고, 생각의 스위치는 끄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고, 이렇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인간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기쁨을 느낄 것이며 또한 모든 존재의 힘찬 생명력까지 느낄 수 있게 된다고 말이다. 성공이라는 거창한 단어보다 그저 앞으로 가기 위한 한걸음들의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그 자체에서 희망의 지푸라기를 만들어보는 것. 성곤은 자기 자신을 그대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조금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다 어느 순간 자신을 덮고 있는 껍데기를 벗고, 지푸라기가 튜브가 되어 떠오를 수 있기를 기대하며 내면의 근육을 단련시켜 나간다.
이대로 김성곤이 성공하여 해피앤딩을 맞이하게 되었다면 좋았을까?
이후 김성곤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적 같은 기회들로 본인이 원했던 성공의 자리까지 가게 된다. 역시, 노력하는 자에게 인생은 배신하지 않아! 라며 소설책에서 흔히 나오는 성공의 공식대로 끝이 나길 기대하던 순간, 김성곤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다.
독자로서 성곤의 인생에 나를 대입하여 몰입하던 상황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이건 소설이니까 그대로 끝났어도 트집 잡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대리만족이라도 하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작가는 인생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걸 알려주듯이 주인공의 인생에 또 한 번의 까나리액젓 같은 쓴맛을 선사한다. 동시에 내 입안에 비릿하게 감돌던 쓴맛은 기분 탓이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성공의 자리에서 내려가기 싫어한다. 그중 많은 사람들이 핑크빛 성공이 영원할거라 철썩같이 믿는다. 그러나 얻어걸린 성공이라는 자만심에 속아 지속적인 발전을 하지 못하고 변화를 멈추는 순간, 이전의 찌질했던 나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쉬워 보이지만 정말 어려운 것은 기적 같은 성공을 거둔 순간이나 혹은 그 반대로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도 초심을 잊지 않고 더 나은 변화를 위해 천천히 나아가는 법을 기억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은 김성곤도 나도 깊이 새겨야 하지 않을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운명이 늘 내 편일 수는 없다는 건 이제 나도 안다. 그래서 삶이 때때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느낄 때 ‘Back to the Basic!’을 외치며 숨 한 번 크게 쉬고 지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불현듯 불투명한 미래를 떠올리다가 가슴이 철렁하기도 하지만 다가오지 않은 날들 때문에 오늘 하루를 망치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아본다. 그 하루하루가 변화했던 어제가 되어 나의 내일을 더 멋지게 살아내게 하는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되었으니까.
김성곤 안드레아를 비롯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모두 그런 하루를 살기 바라본다.
이 글은 '월간슬초' 잡지 10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