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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내자 Mar 26. 2024

눈깔이 도른자에게 듣는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말

알아서 한다는데 뭘 걱정하냐


아이의 입에서 "내가 할게."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아주아주아주 어렸을 적, 생후 24개월 즈음?

한참 입이 트이고 말을 배우는 아이가 스스로 뭔가를 해보고 싶어서 했던 말이었다.

"죵후가 하께."라는 귀여운 말.



사람 같지 않은 인형이 스스로의 존재를 뽐내던 그때는 미친듯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뭐든 해볼 수 있게 해줬다.

물론 내가 뒤에서, 옆에서 위험하지 않게, 다치지 않도록 잘 돌보면서 말이다.



아이는 엄마의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마음껏 만져보고 관찰하면서 잘 컸다.

뭐든 경험해보면서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여유로웠던 나였다.






그렇게 순하게 크던 아이의 입에서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말이 나왔다.

전문가들 입에서 그럴 때라고 말하는 그 시기, 사춘기가 왔기 때문이다.

뭘 어떻게 알아서 하겠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릴적과는 다른 불안함이 앞섰다.



그런데 무슨 불안함? 어떤 불안함인가?

도대체 이 불안함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툭 까놓고 말하자.

공부라서 그렇다.

하루하루 제대로 익히고 받아들여서 지식을 쑥쑥 늘려가도 모자랄 판에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딱 잘라 말하니 불안함이 먼저 튀어나올 수밖에.




눈깔이 도른자와 대치한다는 것은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놀란 마음 추스르고 바톤을 넘겼다.

그렇게 아이에게 공부 주도권을 넘기고 나서 이게 잘하는 짓인지, 지금이라도 조금의 간섭을 해야하는 건 아닌지 고민이 되었지만 이미 넘어가버린 공부 바톤은 나에게 오지 않았다.

아이 옆에서 슬쩍 어찌되가냐고 물었을 때 나타나는 흰자와 찌릿한 기운에 쫄아 학교간 틈을 타서 몰래 보는 흔적들.

뭔가 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입이 삐죽 나왔다.





그런데 이상하다.

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게 된다.

매일 저녁 집에서 들렸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할 일 다 했니? 어떻게 하고 있어? 언제 끝나?"

그냥 아이가 하겠다고 한 이후부터 내가 할 일이 없어진거다.



매일 확인하지 않아도 되고 체크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냥 알아서 하겠거니 생각만 한다.

아이가 혹시 제대로 못했어도 스스로 조절해서 하라고만 말해줄 뿐, 큰 소리가 오고가지 않는다.

마음이 편해졌다.



오늘도 영어 공부 때문에 아이와 대화를 나눴는데 주도권이 많이 넘어간 것을 느낄수 있었다.

예전에는 영어 공부를 이거이거 이렇게 저렇게 해야한다며 아이를 끌고 갔다면 오늘은 어떻게 해야할까?하고 아이와 상의하고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게 대화가 이어졌다.


신중한 성격답게 아이는 어떻게 하겠다는 대답을 즉각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자기도 복잡한 심정이겠거니 싶어 잘 생각해보라고만 말하고 어깨를 토닥토닥 해줬을 뿐이다.



급하다면 급한 사안이지만 왠지 아이가 믿음직스러웠다.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말한 시점부터 아이 스스로 책임감이 커졌음을 느낀 것 같다.

엄마의 걱정도 알고 있는 것 같고, 스스로도 미래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것이 느껴진다.



결론적으로 눈깔이 도른자의 입에서 나온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말은 오히려 나에게 안정감을 가져다 주었다.



키만 큰 것이 아닌 마음도 생각도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아이.

이제 엄마인 나는 이런 아이의 선택을 지지해주고 홀가분함을 느껴야할 때인 것 같다.

언제까지 내가 다 해줄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물질적인 것도 아니고 뛰어난 머리도 아닌 "독립"이라고 했던 전문가의 말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너의 앞날을 응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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