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청에서 일하던 시절에 비하면 상상도 못 할 여유로운 일상이다. 이런 복된 조건이 1년간 학습둥지 프로젝트를 끌고 나갈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공무원이란 직업이 몇 년에 한 번씩 순환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보니 매년 인사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올 해는 아무래도 이 아름다운 고장을 떠나 이동을 할 수밖에 없다.
인사 상담을 받거나 인사 고충을 토로해서라도 조용한 장소에서 아이들을 키우게 해 달라 조를 수도 있지만 나만 아이를 키우는 것도 아니고 늦은 입사와 결혼과 육아 등의 문제로 동기들에 비해 밀릴 대로 밀린 승진에 대한 고심도 할 때라고 주변에서 조언을 한다. 사회적인 성공보단 아이가 먼저인 아줌마이다 보니 승진에 대한 욕심은 차치하더라도 이미 무딜 대로 무뎌진 아줌마 감각으로 계속 시골에 있다가 완전히 바보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끔은 든다.
하지만 머리가 공허해질 정도로 고심을 하고 인사 상담을 포기한 이유는 따로 있다.
이번에 본청에 들어가야 아이들에게 학습둥지 프로젝트를 위한 제안서 하나, 사업구상하나 제출할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욕심 때문이다.
조용한 변방 면사무소 직원으로 살아가면서 배우려고 모인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정책이나 장소하나 마련해주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 집 두 녀석 입장에선 반복적인 업무라도 때 되면 마치고 저녁 한 끼라도 해줄 여유가 있는 엄마라는 위치가 훨씬 나을 테지만 배우겠다 모여든 엄마들과 아이들 그리고 평생에 아이들 영어수업에 진심인 선생님까지 이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해선 지금이라도 해결안을 찾아줄 수 있는 부서로 옮기는 것이 방법이지 않을까?
오늘은 더 늦기 전에 꼭 한 번 쓰고 싶었던 내 사랑하는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쓸까 한다.
엄마는 이곳 단양에서 작은 미용실을 운영했다. 그때 내 나이가 12살 정도였는데 먹고살 길을 찾아 수도권을 돌다 외갓집과 가까운 단양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기억한다. 옛날 어른들이 미용사란 직업은 팔자가 험하고 남편복이 없다고 했는데 우리 엄마가 그 말에 딱 들어맞는 박복한 여자였다. 단양에 정착하게 된 이유도 무능한 남편과 억세게 운 없는 본인의 팔자와 부족한 경제관념이 만들어낸 운명이 이곳까지 그녀를 밀고 밀어서 온 것이다.
우리 엄마는 너무 순수하다 못해 약간 모지란 사람이었다.
장날마다 파마하러 온 할머니들에게 파마가 끝나면 배가 고프니 보리밥을 드시고 가시라며 식당에서 밥을 꼭 시켜줬다. 그럼 할머니들은 파마를 말고 보리밥을 먹고 요구르트를 마시고 버스를 타고 돌아갔다. 파마를 해서 과연 얼마를 버는진 모르겠지만 매상의 절반 이상은 그날 손님과 함께 먹고 노느라 썼다.
어느 날 저녁엔 배가 너무 불러 소화제를 먹겠다길래 무슨 영문인지 물으니 시간 차로 온 여러 할머니팀 때문에 점심때 보리밥이며 짜장면을 세 번이나 먹었더니 도통 소화가 안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던 사람이다.
지팡이를 짚고 미용실 앞을 지나가는 노인이 있으면
"어른 잠시 앉았다 가세요. 요구르트도 한 병드시고 제가 돈 안 받을 테니 이발 좀 하고 가세요."
이러면서 정말 무료로 이발을 해주곤 했다. 돈 한 푼 안 받고 그리 머리를 해주고 먹을 것도 챙기냐 물어보면
"우리 엄마가 그러니까 외할머니 말이야 다리가 많이 아팠잖아? 돌아가시기 전에 지팡이를 저리 짚고 다녀서 지팡이 짚고 걷는 어른만 보면 우리 엄마 생각이 나. 내가 말을 억세게 안 들었잖니? 하지 말란 미용사도 하고 가지 말란 시집도 가고 엄마 말 안 듣던 딸이다 보니 엄마 닮은 어른 지나가면 엄마가 보고 싶더라. 그래서 저 어른들 머리라도 공짜로 해드리고 싶네. 엄마가 가진 재주가 그것뿐이 더 있겠니? "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부터 생긴 '지팡이어른 무료 이발'과 미용실이 쉬는 날마다 경로당과 노인정을 방문해 무료 이발봉사활동까지, 엄마가 암과의 사투로 가위를 놓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해오던 활동들이다.
남들에게 열심히 나누며 베풀고 살아왔지만 자식들에겐 온전히 멋진 부모는 아니었다. 그냥 하루하루 살뿐이었지 잘 살진 못한 위인이었는데 마지막 돌아가신 뒤 남은 재산을 한정승인해야만 빚을 끝낼 수 있을 정도로 경제관념이 꽝이었던 분이다.
난 그런 엄마에게 자식한테 빚 말고 제대로 된 것 하나 남겨 준 게 없다며 투덜거리던 딸년이다. 임종 후 발인 전 마지막 입관 때 엄마에게
"사랑하는 엄마. 항상 행복하고 즐거웠지만 다음 생이 있다면 그냥 친구나 아는 사람으로 만나자. 난 딸로는 엄마 만나기 싫어."라는 인사를 남길 정도로 모진 딸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침마다 엄마 생각에 차를 몰고 시골길을 달려가면서 눈물을 몇 번씩이나 훔치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냥 내 새끼만 생각하고 살면 좋겠는데 나 편한 거, 나 좋은 것만 생각하고 살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