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 배고파!"
늦게까지 업무를 하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집에 들어가려는 데,
아까 먹은 저녁밥이 벌써 소화가 다되었는지 허기가 져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야식을 먹을까 5초쯤 망설이다 고생한 오늘의 나에게 포상을 내리기로 하고
집 근처 단골 식당으로 향했다.
늘 그렇듯, 씩씩하게 식당문을 열고 사장님께 밝게 인사하며 내 존재를 알렸다.
"사장님, 오늘은 손님이 왜 이리 없어요?"
"하하 아녜요. 방금까지 단체 손님들 받느라 정신없었어요."
이런, 헛다리 짚었다. 실없는 넉살이 이럴 땐 안 좋다니까.
oo제면소.
쫄면과 덮밥, 각종 분식류를 파는 식당.
오픈 한지 1년쯤 되어 아직은 생생한 느낌이 나는 아이보리 톤 인테리어가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10개 남짓한 테이블 중 가장 안쪽 구석자리에 앉아 키오스크에 눈을 고정했다.
마침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씨라, 높아진 습도에 센치해진 기분과 잘 어울리는 감자전을 담은 뒤 뭔가 부족할 것 같아 무침 만두까지 시켰다.
이 집 감자전은 쫀쫀함이 살아있어 한입 진득하게 베어 물면 입안 가득 퍼지는 감자향과 따뜻한 기름이
조화를 이뤄 예술이었다. 여기에 무침만두는 느끼함을 잘 잡아주니 자꾸 생각날 수밖에.
#2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스마트폰을 보는 대신 무심히 가게 이곳저곳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창가 자리의 테이블이 약간 비뚤어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밖을 지나던 중년 남성과 눈이 마주치자 머쓱하게 시선을 거뒀다.
왼손으로 턱을 괸 채 검지손가락으로 인중을 쓰다듬으며 키오스크가 있는 쪽으로 눈을 옮겼더니
A4용지 한 장 크기의 갈색 쟁반 위에 놓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업소용 사각 휴지통 하나와
종이컵 두 줄이 들어왔다.
자리와 먼 쪽의 종이컵들은 가까운 쪽에 비해 훨씬 키가 컸다. 호기심에 숫자를 세어보니
먼 쪽의 종이컵은 25개, 가까운 쪽은 7개였다.
'역시 사람이든 물건이든 손 닿는 데 있어야 해'라는 생각이 들며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3
대학교 4학년 때였나, 아니구나.
3학년 때구나.
같은 학과 학생을 좋아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티를 내기가 어려웠던 게, 나와 친한 후배 녀석도
그녀에게 호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거든.
후배의 마음 정도를 알 방법은 없었지만 나도 누구 못지않은 순정파라(당시만 해도 그랬다. 어쩌면 지금도?!) 갈수록 그녀 생각에 힘들어졌다. 어떻게 해서든 자주 볼 타이밍을 만들고 싶어 여럿이 함께하는 학과 술자리도 자주 마련했지만 그녀는 잘 참석하지 않았다. 미칠 노릇이었다. 좀처럼 대화 나누고 친해질 기회가 없으니 말이다.
반면 후배는 마침 그녀와 같은 교양 수업을 듣는 데다, 우연히 팀플 같은 조까지 되었단다. 짝사랑이 질투가 되어 애먼 후배를 머릿속으로몇번이나 제거했지만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둘은 일주일에 두 번은 자연스럽게 손 내밀면 닿을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어찌어찌 감정을 교류하다 결국 해피엔딩을 맞이했다.
그때 거리와 빈도가 이성 간의 호감 형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배웠다. 비록 나는 새드엔딩이었지만, '거리와 빈도 법칙'을 지켜 그 후 몇 번의 연애에 성공했으니 남는 장사였다.
"주문하신 감자전과 무침만두 나왔습니다."
사장님의 친절한 말이 나를 다시 현실로 소환했다.
김이 모락모락, 기름이 뽈뽈뽈뽈 묻어나는 감자전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