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시작되는 공간
#1
스무 살 봄, 대학 새내기로 한창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즐기고 있었다.
물론 술은 필수 옵션이고.
무거운 입시의 옷을 벗어던진 홀가분함이 좋아 평소 관심 있던 음악 동아리에 가입했다. 2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 중앙동아리로 내 기수만 열두 명이었다. 사실 본격적인 공연 연습에 돌입하기 전이라 서로 노래 실력 같은 건 잘 몰랐다. 그저 출신 학교도, 지역도 다른 청춘들이 음악이라는 공통 관심사로 모인 인연이 신기해 친해지려 노력했을 뿐.
그날도 동아리 방에서 한창 술 마시며 수다를 떨다 누군가의 선창으로 학교 앞 노래방으로 향했다. 반쯤 취기 오른 눈에 길 여기저기에 새내기들 특유의 들뜸과 생기가 돌아다녔다. 허름한 2층짜리 회색 건물 지하에 위치한 노래방의 가장 큰 방으로 우르르 들어가 각자 자리를 잡았는데, 아무래도 남자들과 여자들이 아직 어색한 상태라 같은 성별끼리 모여 앉았다.
나는 이미 친해진 범준이와 음악과 사랑에 대한 설익은 썰을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어, 누가 먼저 시작하면 열심히 호응해 주리라고만 생각했다.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마침내 윤미가 스타트를 끊겠다며 노래방 리모컨의 번호를 눌러댔다.
약 10초간의 잔잔한 전주가 흐른 뒤 첫 소절이 시작되자마자 범준이와의 대화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감정 표현과 음색, 음정 모두 완벽해 홀린 듯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노래 잘하는 사람을 직접 본 적이 처음이라 멍하니 감상만 했다.
사실 윤미는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다. 자연 갈색 단발머리에 둥근 뿔테 안경을 쓴 동글동글한 얼굴, 아직 고3 티를 벗지 못한 모습이었다. 성격도 조용해서 동기들의 말을 그저 듣기만하며 적당한 리액션만할 뿐 본인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친분을 쌓을 기회가 없어서 인지, 윤미의 노래 실력이 반전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미 세월이 오래 지나 그날 들은 노래가 뭐였는지 잘은 기억 안 나지만 눈을 감고 집중해 노래하던 윤미의 모습에 모든 것이 달라져버렸다.
4분 남짓한 노래가, 2년간의 짝사랑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2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과 계기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상대방이 '반짝'인다는 것.
그 반짝거림은 빈틈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나만 아는 곳에 자리 잡아
심장을 뛰게 하고, 아프게 하고, 주눅 들게 한다.
빈틈은 자력으로는 메울 수 없기에, 한번 누군가 들어왔다 나가면
점점 더 벌어지게 된다.
스무 살 때 내게 생긴 노래라는 빈틈은, 그 후로도 노래를 잘하는 사람에게 깊은 호감을 느끼는
일종의 물리 법칙으로 작용했다.
연애 경험이 쌓일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듣고 보는 것이 많아질수록 빈틈의 종류 역시 다양해진다.
허점을 파고들려는 반짝거림을 막아내기가 영 쉽지 않은 이유다.
어쩔 수 없이 빈틈을 허락해 상대방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면 미리 걱정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일단 가만히 두자. 그리고 반짝거림이 엮어 줄 인연의 흐름에 몸을 맡겨 보는 건 어떨까.
새로운 사람이 가져다주는 감정과 경험이, 우리를 더욱 풍요롭게 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