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대학 시절부터 나와 붙어 다니던 단짝이었는데, 학교와 전공은 달라도 어쩌다 알게 되어 자주 만나며 흑역사도 마음껏 생성했다. 무슨 일만 있으면 술마시자고 부르고 서로 가정 상황 등 내밀한 사실까지도 공유할 정도였으니 절친이라 할만했다.
적어도 그 녀석이 취업하기 전까지는.
공대생인 A는 동대학원에 진학해 석사까지 마쳤다. 취업 문이 넓어 소위 말하는 대기업 연구직으로 들어가더니 소위 '어깨 뽕'이 심하게 찼다. 당시 개인적인 사정으로 방황하던 시기인 나를 앞에 두고 대놓고 거들먹거리기 일쑤였다.
이상했다. 내가 알던 친구가 맞는지 혼란스러웠다.
녀석의 취업 성공을 누구보다 응원하는 것도 모자라 특기를 살려 자기소개서도 손봐줬으니 친구의 변화가 당황스러울 수밖에. '잠시 지나가는 대기업병'이라 생각하고 관계를 이어나갔음에도 변하지 않았다. 반복되는 무시와 걱정하는 말을 앞세운 깔봄에 나도 모르게 위축되었고, 그걸 포착한 A는 더 기고만장했다.
결국, 거리두기에들어갔다.
연락이 와도 가끔 안 받거나 친구들 모임도 자제하며 만남의 빈도를 줄여나갔다. 그 후 나름의 길을 개척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내 마당 안으로 들이게 되었는데, 솔직히 A보다 모든 스펙이 월등한 사람들임에도 녀석에게서 느낀 교만의 냄새는 전혀 풍기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나도 자리를 잡았을 무렵, A에게 연락이 왔다. 죽은 줄 알았다는 녀석 특유의 넉살에 '그래, 이만하면 됐지'라며 흔쾌히 약속 장소로 향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 욕 섞인 인사로 시작해 안부를 물으며 그간의 삶의 궤적을 설명했다. 처음엔 오랜만에 만나 좋았는데, 술이 한두 잔씩 들어가자 A의 버릇이 또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일을 두고 폄하하는 듯한 말에,
남아있던 일말의 기대가 '툭', 끊어졌다.
#2
골디락스 존(Goldilocks Zone, 생명 거주 가능 영역)이란 말이 있다. 태양과 같은 항성 주변에 생명체가 존재하기에 적합한 지역을 뜻한다. 태양계의 골디락스 존에는 우리가 사는 지구가 속한다. 골디락스 존을 벗어나 항성과 가까워지면 금성처럼 평균 온도가 400도가 넘는 불지옥이 펼쳐지고, 반대로 멀어지면 모든 열적 운동이 정지하는 절대 영도에 가까운 얼음별이 된다.
사람들 사이에도 골디락스 존이 중요하다.
적당한 거리와 안정적인 궤도를 유지해야 오래 공전하며 생명력 넘치는 감정과 경험, 추억을 싹 틔울 수 있다. 적당히를 모르면, 싸우거나 조용히 멀어지거나 둘 중 하나로 귀결된다.
비록 A와는 수년 째 연락이 끊겼지만, 사람 관계에서 적당한 거리와 조심이 얼마나 중요한 지 배웠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