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 서류에 도장을 찍은 적이 없는데..?'
머리를 미친 듯이 쥐어짜내 봤지만
도장을 찍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 측이 제출한 연대보증 동의서에는 내 이름 석자가 한글로 적힌,
인감도장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내가 직접 찍은 게 아니기에 분명 누군가 내 인감을
도용한 것이 분명했다.
인감.. 인감.. 그 두글자가 머릿 속을 한참 굴러다니며
과거의 기억을 두들겼다.
그러다 문득, 2년 전 대학에 입학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날은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매우 다급했다.
"솔아, 엄마가 쓸 일이 있으니까 동사무소 가서 빨리 인감 도장 만들어
등기로 보내다오."
"인감? 내 인감을 왜?"
"글쎄 이유는 묻지 말고 일단 만들어. 나중에 설명해줄게."
"아니, 이유를 알아야 할거 아냐."
뭔가 불안해 거듭 질문했지만 일단 만들라는 재촉만 돌아왔다.
사실 그때만 해도 어려서 인감 도장의 중요성과 용도를 몰랐기에
찝찝한 생각이 들었지만 계속된 부탁에 시키는 대로 만들어 보냈었다.
'아, 그래서 내 인감 도장이 필요했구나!'
어머니에게 전화해 사실대로 말해달라고 했지만,
자신은 내 인감 도장을 도용한 사실이 없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생활이 쪼들리자 회사의 자금을 유용했는데,
그 사실이 드러나자 법적 처벌 받을 것이 두려워 그들이 시키는 대로
일단 자식인 나를 연대보증인으로 세운 것이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며 그 회사 사람들의 농간이라고 주장했다.
어머니는 늘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불리하면 교묘히 거짓말하고, 부정하고, 읍소했다.
일단 큰소리부터 치며 억울하다고 난리를 부리니
사람들은 일단 '정말 그런가?'라고 한 발 물러나지만
시간이 지나 실체를 알게 되면 더 크게 실망하고 분노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했더라면 방안이라도 찾았을 텐데 이미 늦은 뒤였다.
나는 결국 재판장에 나가야했고, 회사 사람들을 마주해야했다.
무섭고, 두려웠다.
서류상으로 이미 명백한 상태였기에, 재판은 패소했고
난 4천만원의 빚을 추가로 떠앉고 말았다.
1억 1천만원이라는 빚의 무게는, 22살의 나를 완전한 절망에 빠지게 하기 충분했다.
또한, 인간성을 잃게 만드는 계기이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어머니로부터 이런 읽을 겪었으니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선의를 가지고 내게 다가오는 사람도, 분명 흑막이 있을 거라며 의심하고 밀어냈다.
철저히 세상은 나 혼자라는 생각에 절벽 끝에 맨말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비뚤어지고, 생각과 마음이 꼬여버렸다.
그때 촘촘하게 엉켜버린 마음과 굳어진 생각은,
지금도 가끔씩 나를 힘들게 한다.
아버지 역시,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냥, 말로만 걱정할 뿐 이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모르는 듯 했다.
정말 아버지 상황이 힘들고 어려웠다면 애써 원망하는 마음을 누를 수 있었을지도.
그러나 그게 아니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빚을 조금이라도 정리해줄 수 있는 여윳돈이 있었음에도
당시 군대에 가있던 친형이 제대했을 때 사업 밑천을 대줄 생각이라
내게 돈이 있음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누군가는 열심히 미래를 준비하고 공부할 시기에
난 지독한 우울감과 절망, 현실의 빛과 싸워야 했다.
부모,
부모,
부모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