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우울증의 시작

by 원솔
"술은 행복한 자에게만 달콤하다.” - John Keats


술은 참 신기하다. 한잔 쭉 들이킨 술이 목을 싸르르 타고

위까지 내려가면 뜨끈한 느낌이 배를 진동하며 온몸에 퍼진다.


점점 세상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고 알딸딸한 기분과 쾌락이 머리를 감싼다.


"괜찮아, 나중에 생각해"라며 나를 격하게 위로 한다.

힘들 때 술은 친구나 가족보다 든든한 존재가 된다.


알콜이 WHO가 정한 1군 발암물질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술을 찾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솔이가? 아빠다."


이혼 후, 아버지는 매일 술에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전화하셨다.

이미 만취 상태로 건 전화이기에, 제대로 소통될리가 없었다.

내 대답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반복되는 질문에 답답함을 느꼈다.


늘 같은 패턴의 반복이었다. 사실 같이 살 때도 아버지는 저녁에 맨 정신일 때가 드물었다.

늘 어디선가 술을 드시고 와선 알콜 냄새를 풀풀 풍기며

어린 나와 형에게 자신의 괴로움을 토로하며 신세를 한탄했다.


아침이 되면 숙취로 괴로워하면서도 저녁엔 또 밖에 나가 술을 드시고 오셨다.

그러니 어머니와 불화가 없을 리가.


가장이 제대로 가정을 건사하지 않고 술에 취해 헤롱거리니 답답했을 거다.

어린 내가 봐도 그런데 오죽했으랴. 아버지는 술에 취하지 않을 때는 세상 좋은 사람이라,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아버지를 보며, 난 절대 저렇게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환경적, 유전적으로 직결되어 있기 때문일까.


술은 어느새 나를 침습해왔다.





신용불량자가 되고, 재판까지 가게 되자 미래에 대한 희망도, 학업에 대한 열망도 사라졌다.

일단 당장 이번달 고시원비와 생활비를 버는데 급급했다.


누구에게도 손 내밀 수 없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술이 친구가 되어 주었다.

대학생 때라 동기들이나 선배들과의 술자리가 잦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혼자 마시는 게 편했다.


학교 수업이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고시원에 오면 습관처럼 소주 한 두병씩 비우며 시름을 달랬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당시에는 술 한잔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1평짜리 고시원 바닥이 술병으로 가득해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번 들인 잘못된 음주 습관은, 이후 완전히 술을 끊을 때까지 정신과 신체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 시기, 20년 넘게 나를 괴롭히는 우울증도 시작되었다.

막막하고 답답한 상황, 끝이 안보이는 절망은 점점 나를 우울의 늪으로 빠져들게 했다.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가난을 딛고 대학에 합격했다는 자신감으로 누구보다 밝았던 나였는데,

인생이 망했다는 생각과 주변 사람들과의 비교로 점점 위축되어 갔다.


힘든 마음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어 속으로만 앓다보니

내면 구석 구석 곪아 구멍이 났다.


답이 없었다.

아니, 당시엔그렇다고 생각했다.


사회 경험과 지식이 쌓인 지금의 나라면,

일정부분 피해는 있더라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지 모르지만

그땐 경험도 지식도 없는 20대 초반이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지만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했고, 학교에 나가야 했고,

숨을 쉬어야 했다.


그 시기, 나에게 손내밀어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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