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얼 생각하니, 도로시? (2)

-나는 활보다

by 오드리

안나는 오드리가 출근하면 무조건 외출했다. 딱히 볼일이나 약속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냥 바통 터치 하듯이 일단 나갔다. 안나는 넉넉한 외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오드리의 근무 시간을 하루 8시간 주 3회로 조정했다. 당시 도로시의 월 이용시간은 120시간 정도였다. 이용시간은 관련 기관에서 면담 등을 통해 각자의 장애나 재산 등을 점수로 환산하여 책정했다. 활보 입장에서는 이용인의 시간이 많을수록 월급도 올라가지만 그만큼 근무시간도 늘어난다. 오드리는 초보 입장이라 주 3회 8시간이 적절하게 여겨졌다.


안나는 마트 세일 전단지를 모아 이 마트 저 마트 다니며 알뜰하게 장을 봐왔다. 세 식구 살림치고 과한 장보기를 이틀에 한 번 꼴로 하는 셈이었다. 안나는 양손 가득 장을 봐와서 식탁 위에 펼쳐놓으며 자신이 얼마나 싸게 샀는지를 자랑했다. 비슷한 딸기 한 팩도 마트에 따라 가격 차이가 꽤 난다는 것을 오드리는 그때 알았다. 각 마트마다 그날의 대표 할인 상품이 있는데, 안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차를 몰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수고와 시간은 비용에 넣지 않았다. 안나는 어떻게든 8시간을 밖에서 보내야 했고, 그게 최선의 취미였다.


그렇게 장 본 재료로 외출하지 않는 다음날은 하루 종일 반찬을 만들었다. 그러나 냉장고 가득 쌓인 음식은 버려지기 일쑤였다. 도로시 아빠는 주말에도 회사에 나갈 정도로 바빠 집에서 밥 먹을 일이 거의 없었다. 세끼를 챙겨 먹는 건 도로시뿐이었는데 그 양이라야 새 모이 수준이었으니. 안나 자신도 음식 만드는 걸 좋아하는 데 비해 식욕은 없었다. 오전은 커피 한 잔으로 때우고 오후쯤 돼서 그날의 제대로 된 한 끼를 먹는데 그 또한 허기만 겨우 채우는 수준이었다.


오드리는 기본적으로 남이 해준 밥은 다 맛있었고 음식을 남기면 안 된다는 철학이 있어 뭐든 안나가 주는 것이면 접시를 싹싹 비웠다. 안나는 그때부터 오드리를 타깃으로 삼았다. 외출 전에 미리 오드리가 먹을 음식을 준비해 놓기도 하고, 이따금 같이 먹자고 하며 솜씨를 부려 식탁을 차렸다. 도로시 점심부터 먹인 다음 두 사람은 느긋하게 수다를 떨면서 점심을 먹었다. 안나는 도로시 돌봄에 전념하면서 고립되긴 했지만 원래 낙천적이고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었다. 오드리와 수다를 떨거나 갓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안나는 원래의 기질이 되살아나곤 했다. 쾌활한 목소리로 떠들면서 항상 깔깔깔 웃었다. 도로시의 표정도 엄마가 웃을 때면 어딘지 생기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안나가 마트 다음 들르는 곳은 단골 옷집이었다. 옷집 여주인은 안나의 상황과 스타일을 꿰뚫고 있어 아무 때나 가도 마음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거기서 차를 마시며 한참을 떠들고 나면 안나 자신도 보통의 다른 여자들과 비슷한 삶을 산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그 대가로 옷집을 나설 때 안나의 손에는 쇼핑백 두세 개가 들려 있었다. 안나는 리넨 소재의 원피스 스타일을 좋아했는데, 문제는 옷장마다 빽빽하게 들어찬 옷들이 모두 똑같다는 점이었다. 신상이라고 사온 옷이 기존 옷과 뭐가 다른 걸까 하고 오드리는 골똘히 생각했다. 안나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안나는 사온 옷을 던져놓으며 이제 다시는 안 갈 거라고 씩씩댔다.


하지만 옷집 여주인은 안나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무심하게 내버려 뒀다가 안나가 슬슬 마음이 풀리고 신상을 궁금해할 때쯤 귀신같이 알고 전화를 해왔다. 어떻게 지내냐며 수다를 떨다가 마지막에 끊을 때쯤 '바람도 쐴 겸 차 한 잔 마시러 나와요. 언니한테 꼭 맞는 옷 하나 빼놨어요.' 하면 안나는 그 말에 쏙 넘어갔다. 물론 집을 나설 때는 가서 차만 마시고 올 결심이지만 돌아온 안나의 손에는 역시나 똑같은 스타일의 옷이 들려 있었다. 안나는 새로 사 온 옷을 소파에 던져둔 채 며칠이고 방치했다. 암만 생각해도 그 여주인이 바가지를 너무 씌웠다며 환불받으러 갈 거라고 벼르지만 결국 그 옷은 옷장으로 들어간다. 더 이상 옷이 들어갈 공간은 없었지만 안나는 그녀의 전화를 끊지 못했다.


안나는 늘씬한 키에 가냘픈 몸매라 옷발이 좋았다. 그녀가 딱 차려입고 나서면 어디 부잣집 사모님 같았다. 슬픈 일은 그렇게 차려입고 갈 데가 마트뿐이라는 거다. 그 동네에서만 20년 가까이 살았으나 안나는 친구가 없었다. 옛 친구들도 도로시 때문에 장시간 외출을 못하다 보니 하나둘 멀어졌다. 한 번은 오랜만에 친구 모임연락이 왔다기에, 오드리가 그날은 늦게까지 도로시를 봐줄 테니 다녀오라고 했다. 안나는 한껏 꾸미고 갔는데 돌아왔을 때는 표정이 어두웠다.

"차라리 안 가는 게 나았어. 다들 잘 나간다고 웃고 떠드는데 나는 할 말이 없더라고."

안나는 늘 당당하고 누구한테도 기죽는 성격이 아닌 줄 알았는데 그 말은 좀 의외였다. 지금까지 보았던 안나라면 당연히 그 모임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존재감을 뽐내야 했다. 안나의 자신감 있는 모습은 어쩌면 오드리 앞에서만 가능했던 것인가. 그렇다면 활보는 을이고 보호자는 갑이라는 인식이 안나에게도 은연중에 작용했던 모양이다. 오드리는 '나이 먹으면 다 그런 것 같더라'며 안나를 위로했다. 오드리는 정기적인 모임도 있고 쉬는 날이면 만날 동네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안나 앞에서 굳이 그런 티를 낼 필요는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어찌 보면 오드리 역시 장애인 딸을 둔 안나를 우선 배려해야 한다는 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 같다.


도로시는 발 모양이 안쪽으로 오그라들어 있어 서 있기도 힘들었는데, 오드리가 양손을 잡고 당기면 몇 걸음 떼기도 했다. 처음에는 운동이라도 시키자는 마음으로 손을 잡고 거실을 몇 바퀴 돌기도 했다. 도로시는 뒤틀린 발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드리는 문득 발의 통증이 있어도 도로시가 표현을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뒤 운동은 점차 안 하게 되었다.

어쩌다 한 번씩 외출을 할 때는 휠체어를 펴서 앉힌 다음 엘베로 내려가서 차 뒷좌석에 태우고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넣고, 목적지에 가서 다시 휠체어를 꺼내 펴고 도로시를 차에서 내려 앉혀야 했다. 휠체어를 다루는 자체도 힘들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외출복을 입혔다가 벗겨야 하는 그 반복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다 보니 도로시는 병원 방문 외에는 외출을 할 일이 없었다.


주말 지나 오드리가 월요일 아침에 출근해 보면 안나는 얼굴이 퀭했다. 이틀간 도로시만 끌어안고 갇혀 살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주말 동안 충전을 잘한 오드리는 그 에너지를 안나에게 나눠주었고 차 한잔 마시며 일상의 리듬을 회복한 안나는 예쁘게 꾸며 입고 외출했다.

오드리가 안 오는 날이면 안나는 하루 종일 폰을 들고 지냈다. 자잘한 인터넷 쇼핑 택배는 매일 문 앞에 쌓였다. 싸고 쓸모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도로시를 케어하는 일 외에 안나가 집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인터넷 쇼핑뿐이었다. 그 모든 일들이 처음에는 낯설고 놀라웠지만 시간이 갈수록 오드리는 그들 모녀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겨울에 일을 시작했는데 어느새 봄 여름이 지나고 가을을 맞이할 만큼 일 년이 훌쩍 지나갔다. 그렇게 새로운 사계절을 또 맞이하겠거니 하며 오드리는 마음을 놓았다. 무엇보다 처음 하는 활보 일에 적응을 못하고 바로 잘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서는 벗어난 것이다. /


keyword
이전 02화무얼 생각하니, 도로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