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적운 May 03. 2022

지워지지 않는 얼룩

  지워지지 않는 얼룩에 대한 얘기를 들은 건 학교 앞 작은 펍에서였다. 한라토닉 몇 잔에 얼굴이 붉어진 해지가 혼자 사는 삶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에 대해 얘기하다, 갑자기 얼룩 얘기를 꺼냈다. 옷에 묻은 얼룩이 지워지지가 않아. 빨래를 아무리 돌려도 지워지지 않는다니까? 옷만 그런 게 아니야. 수건에도 있고, 바닥에도 있고, 심지어 식탁 다리에도 있어! 크기는 제각각인데 다 안 지워져. 아무리 해도 안 지워져. 이게 말이 돼? 우리 집 가구 다 흰색이란 말이야. 나와 지수는 해지의 목소리를 비지엠 삼으며 빈 잔에 얼음을 채웠다. 우리가 크게 반응하지 않자 해지의 목소리는 점차 커졌다. 하나 더 시킬까? 세트로. 지수를 향해 조용히 물었는데 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들어 해지를 바라보았다.

  버스랑 지하철에도 얼마나 얼룩이 많은지 아니.

  뭐?

  고작 얼룩 때문에 힘들다고 얘기할 거면 차라리 하지 말라고.

  넌 무슨 말을 그딴 식으로 하냐?

  해지가 천천히, 그리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혀가 자꾸 꼬이는 건지 몇 번 발음을 씹을 뻔했다. 야아. 해지에게 조용히 말을 건네며 지수의 표정을 확인했다. 지수는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지수가 얼음이 가득 들어찬 유리잔을 들어 입 안에 털어 넣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적막을 메웠다.

  난 얼룩 같은 거 상관없으니까 자취라도 해 봤으면 좋겠어.

  지금 그게 할 말이야?

  그렇잖아. 네 본가가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너 마음만 먹으면 나보다 덜 걸린다며.

  말이 왜 그렇게 돼. 내가 언제 통학이 안 힘들다고 했어? 야, 김지수. 너 왜 나한테 시비야?

  너야말로 말 좀 예쁘게 하지?

  너희 둘 다 취했다. 일어나자.

  내가 먼저 짐을 챙겼다. 상 위에 꺼내 놓았던 지갑과 휴대폰을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고서는 더 일찍 말리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웃음기가 빠진 얼굴들은 무어라 더 말을 하려다 입을 닫고 외투를 집어 들었다.

  내가 계산할게.

  차마 테이블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먼저 계산대로 향했다. 한꺼번에 해 주세요. 익숙한 얼굴의 사장님은 내가 앉아 있던 테이블을 흘긋 쳐다보았다. 서비스로 받은 샐러드는 바닥을 보였다. 어지러운 마음에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잊은 나는 사장님이 건네는 카드를 받아 들었다. 영수증은 버려 주세요.

  밖에 나왔을 때 해지는 아무렇게나 쪼그려 앉아 있었다. 지수는 그보다 세 걸음쯤 앞에 있는 건물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해지에게 손을 뻗었다. 가만히 지수를 바라보던 해지가 내 손을 잡고 체중을 실어 몸을 일으켰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더 취기가 올라오는 듯 해지는 가만히 서 있지 못하고 자꾸 비틀거렸다. 해지가 사는 곳이 여기서 삼 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큰 안도로 다가왔다. 해지는 자꾸만 소리를 내어 숨을 뱉었다. 지수는 반이나 남은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지고는 발로 비볐다. 나는 해지를 대충 부축하며 지수에게 걸어갔다.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없었고, 그건 마치 일련의 의식 같았다.

  나 혼자 갈 수 있어.

  해지가 손을 흔들며 원룸이 많은 골목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 등이 서운함보다는 화가 났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를 쫓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을 막은 건 지수였다.

  2차 가자.

  뭐?

  저 앞에 우리 자주 가던 막걸리 집. 거기 갈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수에게 내 의사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지수는 해지의 집과는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자주 가던? 그게 언제더라. 최소 3년 전이었다. 우리 셋 다 스무 살이었을 때의 얘기니까. 나는 한숨을 뱉고 지수의 뒤를 따라갔다. 오늘따라 친구들의 등을 자주 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해지가 향한 골목으로 시선을 두었다가, 급하게 보폭을 맞춰 지수의 옆에 나란히 섰다.

  여기는 내가 낼게.

  자리에 앉자마자 지수가 말했다. 지수는 원래부터 이곳에 오고 싶었던 것처럼 메뉴판도 보지 않고 감자전과 막걸리 하나를 시켰다. 지수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곳은 해지와 지수, 그리고 내가 스무 살 때 자주 오던 곳이었다. 도서관에 모여 시험공부를 하다가도, 과제나 발표 준비를 하다가도 종착지는 꼭 이곳이었다. 어느 정도 취하고 나면 바로 앞에 있는 코인 노래방에 가서 각자 노래를 두세 곡씩 부르고 난 뒤 셋이 함께 기숙사로 향했다. 지수는 B동, 나와 해지는 A동이었다. A동과 B동은 지하 1층이 이어져 있어서 우리는 꼭 지하 1층에서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스물한 살이 되었을 때, 우리는 정해진 수순이었다는 듯 멀어졌다. 지수와 해지는 통계학을 복수전공하기 시작했고, 나는 뒤늦게 과 학생회에 들어갔다. 지수와 해지, 그리고 나까지 셋이서 같이 듣는 수업이 하나도 없었다. 시간표를 짜던 겨울방학에 지수와 해지에게 몇 개의 전공 수업을 같이 듣지 않겠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이 수업은 과제가 없고, 이 수업은 학점을 잘 주신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지수와 해지는 말했다. 우리 이번 학기에 통계학 수업 많이 들어 놔야 해서……. 학기가 시작된 후 우연히 학교 시간표 어플을 확인했을 때, 지수와 해지의 시간표는 찍어낸 것처럼 정확히 일치했다. 이상하게 속이 쓰렸다. 울렁이는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어플을 껐다. 그 이후로 다시는 둘의 시간표를 확인하지 않았다. 수업을 같이 듣자고 말하지도 않았다.

  네가 가운데서 고생했네, 미안.

  지수가 감자전을 젓가락으로 뒤적이며 말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려다 말았다. 지수는 나름대로 심란한 건지, 속상한 건지 막걸리를 연거푸 들이켰다. 나는 막걸리 대신 물을 마셨다. 스무 살 이후로 막걸리는 자주 마시지 않았다. 마실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학생회 회식을 할 때에도 가장 싸다는 이유로 소주를 주로 찾곤 했다. 인원이 많은 회식 자리에서는 그게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학생회 일은 딱 일 년이 지난 뒤 그만뒀다. 아무리 해도 일에 익숙해지지 않아서, 일머리가 없는데 괜히 학생회에 들어왔구나 싶었다. 학생회 내부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친한 친구는 없었다. 일을 그만둔다고 말했을 때 그 누구도 붙잡지 않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몇몇 동기들은 아쉽다고 말을 하긴 했으나 누가 들어도 아쉽지 않은 말투라 나는 그 말을 믿지 않기로 했다. 삼 학년 때는 정말 친구가 없이 혼자 다녔다. 이제는 더 이상 빈 시간에 학생회실에 갈 수도 없었고, 이미 무리가 지어진 동기들 사이에 낄 수도 없었다. 지수와 해지, 그리고 내가 함께 있는 단체 메시지 방은 알림이 울리지 않았다. 뭐라도 한 마디 보내 볼까 하다가 휴대폰을 꺼 버린 것이 족히 다섯 번은 넘을 것이다. 외롭지는 않았다. 집에서 먹는 밥은 오히려 건강했고, 술을 잘 마시지 않는 대신 도서관에 자주 가 학점도 많이 올렸다. 우연히 SNS에 들어갔다가 지수와 해지가 둘 다 휴학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도 외롭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채로 어영부영 살아갈 거면 휴학을 하는 게 낫나 같은 고민은 했지만, 그래도 아마 외롭지는 않았다.

  사 학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는 것은 없었다. 전공에 대한 지식도, 학교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 대학원에 간다는 동기들은 여기저기 수소문해 교수님들과의 면담 자리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취업을 준비한다는 동기들은 여러 곳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실무 능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그들이 올리는 SNS를 구경하는 것 말고는 하는 게 없었다. 학점이 썩 나쁜 건 아니었지만 내세울 만큼 좋은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 흔하다는 공모전 수상 이력 한 줄이 없었다. 도대체 남들은 어디에서 그렇게 좋은 정보를 턱턱 얻어 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보는 둘째 치고 하고 싶은 일이나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어쩜 그리 확신이 있는지, 확신이 없다고 해도 그것을 밀고 나가는 추진력은 어디에서 얻는 것인지, 추진력이 없다고 해도 자신이 갈 방향을 정하는 지혜는 어디에서 얻는 것인지…….

  그러다 오랜만에 해지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 오랜만에 셋이서 뭉쳐야지! 귀여운 이모티콘을 붙인 메시지에 곧바로 지수가 답장을 보냈다. 이번 주에 시간 되는 날 있어? 저녁 같이 먹자! 술도 좋고ㅎㅎ! 이상하게도 둘의 메시지는 일제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이미 지수와 해지는 서로 얘기를 끝낸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둘이 만나 대화를 하던 중 갑작스레 내 이름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걔는 요즘 뭐 하고 산대? 궁금한 마음에 메신저에 들어와 스크롤을 한참 내린 뒤 우리의 단체 메시지 방을 찾아낸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미리보기로 그 메시지를 다 읽고 나서 한참 뒤에야 답장을 보냈다. 대박! 너네 복학했어?ㅠㅠ 우리 못 본 지 너무 오래됐다... 나 화요일이랑 수요일 5시 이후로 괜찮아!

  걔가 나쁜 애는 아닌데.

  지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나에게 하는 말이라면 나는 그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해지를 알아온 순간 동안 단 한 번도 해지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수는 꼭 아이를 둔 부모가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에서 우리 애가 나쁜 애는 아니에요, 라며 감싸는 것처럼 굴었다. 선생님이 아직 잘 모르셔서 그렇지, 우리 애가 집에서는 되게 착하고 얌전해요. 그렇게 말하며 멋쩍게 웃는 한 부모의 모습을 상상했다.

  가끔 그렇게 불평불만을 얘기하니까 좀 힘들어. 부딪히기도 하고.

  아무래도 그렇겠지.

  내가 걔네 집 되게 자주 가 봤거든? 진짜 넓어. 이 근방에서 그만한 자취방 구하는 게 쉽지 않은데. 심지어 학교 바로 앞이잖아. 아, 너는 통학하지?

  아니. 나도 자취해. 나는 후문 쪽.

  진짜? 언제부터?

  이 년은 됐을걸.

  지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가만히 바라보자 으음, 하고 짧게 반응하며 뒷목을 긁적였다. 이 학년이 되면서 지수와 해지, 그리고 나는 동시에 기숙사를 나왔다. 나와 지수는 기숙사에 지원했으나 떨어진 것이었고, 해지는 처음부터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겠다고 계약을 마친 상태였다. 지수는 어쩔 수 없이 통학을 해야겠다고 했다. 나는 통학을 결심했으나,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급히 집을 구했다. 여러 부동산을 전전했으나 2월 말에는 매물 구하기가 어렵다는 대답만을 들었다. 적당한 가격에 적당한 집을 고르려면 후문으로 눈을 돌려야 했다. 그때 계약한 곳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으니, 올해로 벌써 삼 년째였다.

  너는 워낙 성실하니까 잘 살겠다. 해지 걔는 청소도 안 하고 빨래도 안 해. 걔네 집 가면 매번 내가 하잖아. 넌 생각해 보면 일 학년 때도 그랬어. 우리는 할 일 잔뜩 쌓일 때까지 미뤘는데 너는 아니었잖아. 과제도 우리는 제출 직전에 급하게 하고 있는데, 너는 진작 다 끝내서 다른 과제 하고 있고. 시험공부 할 때에도 도서관에서 밤새우고 있는데 너는 다 끝냈다고 자러 가고.

  지금 생각해 보면 너 진짜 우리랑 어떻게 다녔냐? 지수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지수와 해지, 그리고 나는 항상 그랬다. 지수와 해지가 급하게 과제를 해야 한다고 머리를 싸매고 있으면 한참 전에 끝낸 나는 그 옆에 앉아 다음 과제를 하고 있었다. 지수가 답 좀 알려 줄 수 있냐고 장난스럽게 물으면 나는 하하 웃고는 모른 척했다. 시험 전날에는 밤새 공부해야 한다며 박카스와 커피를 산처럼 쌓아 놓은 지수와 해지를 보며 나는 먼저 자러 갈게, 라고 인사를 했다.

  지수의 시선에서 나는 어떻게 보였을까. 늘 성실하고 반듯한 사람? 어쩌면 재수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수는 감정을 숨기지도 않고, 말을 날카롭게 하는 사람이니까, 만약 내가 지수를 기분 나쁘게 했다면 먼저 말을 했을 거다. 그래서 지수와 해지는 자주 싸웠다. 마치 오늘처럼 말이다. 그러니 나는 괜찮을 거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지수는 혼자서 막걸리 한 병을 다 비웠다. 조금 더 마실까 고민하기에 그냥 일어나자고 대답했다. 지수가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취한다면 집까지 돌아가기 힘들 거고, 그러면 우리 집에서 자게 될지도 모른다. 해지의 집에 데려다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잔뜩 취한 지수를 부축하며 해지에게 전화하는 상상을 했다. 해지는 물론 언제 싸웠냐는 듯이 한달음에 달려와 지수를 데리고 자신의 자취방으로 향할 것만 같았다.

  바깥 공기가 차가웠다. 지수야, 느리게 부르자 지수가 나를 쳐다보았다. 조심히 가. 볼이 붉게 달아오른 지수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후문까지 데려다 줄까? 지수의 말이 인사치레라는 것을 알기에 괜찮다고 대답했다. 지수는 오늘 즐거웠다고 말하며 큰길로 향했다. 나는 가만히 지수의 등을 바라보았다. 지수와 해지는 곧 있으면 화해를 할 것이다. 화해라고 말할 것도 없다. 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연락을 이어갈 테니까. 다음날 수업 시간에는 늘 그랬듯 바로 옆자리에 앉아 숙취 때문에 죽겠다며 머리를 부여잡을 것이다. 점심 뭐 먹지, 강의 자료를 프린트한 종이 위에 지수가 작게 낙서하면 해지는 해장해야 하니까 국물 요리 먹자. 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스무 살 때 지수와 해지는 그렇게 둘만의 대화를 끝낸 후 수업이 다 끝난 뒤에 나에게 다가와 점심에 뭘 먹을지 말해 주곤 했다. 메뉴가 마음에 들면 그들을 따라갔고,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기숙사에 올라가 학식을 먹었다. 처음에는 꼭 같이 점심을 먹어야 한다던 지수와 해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네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자취방에 도착하여 현관문을 열었을 때에는 이상하게도 바깥 공기보다 차가운 공기가 나를 반겼다. 스위치를 눌러 방 안을 밝혔다. 학교를 갈 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얼룩이 바닥에 커다랗게 생겨 있었다. 급하게 걸레를 꺼내 바닥을 닦았다. 아무리 팔에 힘을 주어 닦아도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다. 조금도 지워지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보이는 천장 끄트머리에도 얼룩이 져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야구 좋아하는 여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