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에게
소슬한 날씨지만 해가 찌기 시작하는 암스테르담.
비, 바람, 우박이 순서 바꾸며 오가던 최악의 시기는 지났나 싶어.
추운 겨울을 잘 붙들고 있길 바라.
마지막을 앞두고는 일상이 거창해질까 싶었는데
사실은 아주 무난하고 평범한 시간을 보냈어.
그러자 오히려 내가 무엇을 그리워할지가 더 선명해졌지.
요즘은 마지막을 움켜잡는 중.
지난 수요일의 일.
몇 번이고 간 반 고흐 미술관에 새 기획전시를 보러 다녀왔고, 바로 옆에 있는 시립 미술관에도 들렀어. 잠시 허기가 져서 바로 옆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어가서 요깃거리로 작은 크루아상 하나를 사 먹었지. 나인 스트리트를 지나며 여기저기 가게를 구경하다가 카페로 향했어. 플랫메이트 J가 전부터 가 보고 싶다던 치즈케이크 전문 카페였는데, 도착하자 T와 G까지 나를 반겨줬어. 유제품을 못 먹는 G는 옆에서 이탈리안 탄산음료를 마시고 있었고, 우리는 G에게 암스테르담에서까지 고향 음식을 먹고 싶은 거냐고 농담처럼 핀잔줬다. 생각보다 기대 이하였던 케이크를 깨작깨작 먹으면서 J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중심가 쪽으로 나올 일도 많아도 다섯 번일 거 같다면서 아쉬운 말을 했어. 플랫으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다 같이 잠깐 슈퍼마켓에 들러 각자 저녁거리 장을 봤고, 도착해서는 다 같이 주방에 모여 각자 요리를 했어. 속 알맹이는 영 없는 농담을 시시콜콜 주고받으며 서로 무슨 요리를 하는지 엿보고 한 입 얻어먹고 그랬지. 그리고 잠에 들기 전 J의 말을 다시 생각했다. 이런 저녁도 머잖아서 그만이구나.
그리고는 바지런히 다녔어. 다니기보다는 눈도장 찍기에 가까웠지. 지난여름에 한 번 갔던 카페를 다시 방문하고, 한동안 못 볼 친구를 만나 작별 인사를 하고, 자주 가던 공립 도서관에 가 책을 읽고, 슈퍼마켓에 갈 때마다 눈에 띄던 간식을 사 먹고, 매일같이 타던 트램을 다시 타고, 숨 돌리러 산책하러 나가던 길을 홀로 걷고, … 일 년 전 암스테르담에 막 도착했을 때, 먼 나라 얘기 같은 일 년 후를 막연히 상상했어. 일 년이 지나 이곳을 떠나야 할 때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온갖 희한하고 특별한 일을 벌이고 있을까. 축제의 마지막 같지 않을까. 5일 남짓을 남긴 지금에는 글쎄, 아직은 말로 정리하기 어렵지만, 지난 일 년이 종말처럼 폭죽을 터뜨리고 아무 일도 없었단 듯 사라지는 축제 같진 않다고 믿어.
오히려 귤 하나를 까먹는 일이랑 똑같다. 귤보다는 오렌지 하나를 까먹는 일-여기는 왕가 이름이 네덜란드어로 Oranje, 즉 오렌지라서 국가 행사나 국가대표 경기가 있는 날이면 죄다 오렌지색 옷을 입고 다니거든-. 다시 돌아와서, 껍질을 까기 전까지는 과육이 실할지 시큼할지 맹맹할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기어코 오렌지 하나를 사고 말지. 껍질을 까면 퍼지는 새콤한 향. 먼저 반을 가르고 한쪽부터 알알이 먹기 시작하는 거야. 과즙이 터지고 기대했던 맛이 나면 흡족하단 듯이 더 빨리 씹기 시작하고 꿀꺽 삼킨 뒤에 다음 알을 먹지. 그리고 다음, 또 다음. 양손 한 움큼 쥐어졌던 오렌지는 내가 먹는 만큼 사라지기 시작해. 한 알 더 먹는다는 건 한 알 더 사라진다는 걸 알면서 우리는 마지막 한 알을 입에 넣지. 대신 꼭꼭 씹어 입안 가득 터지는 알갱이와 퍼지는 과즙을 음미하지. 오렌지를 열어 보니 열두 개의 알. 손에는 빈 껍질만 남을 걸 알면서도 하나씩. 그리고 이제는 마지막 알을 씹는 중.
축제처럼 폭죽이 터지는 화려한 마지막은 아니지만,
나름의 산뜻한 끝을 즐기고 있어.
내일은 관광객이라도 된 양 번화가며 관광지며 이리저리 쏘다닐 예정.
어느 곳에서든 마지막이 되면 처음인 듯 다시 모든 게 생경해지나 싶어.
다음 편지를 보낼 때면 나는 암스테르담에 없겠구나.
이곳에서 하는 숱한 마지막 중 하나가 또 있었네.
더 감성적으로 되기 전에 이만 줄일게.
집에서 편지할게.
안녕.
추신.
암스테르담에 함께 작별 인사를 보내줘.
2025년 1월 13일
암스테르담 교외 단칸방에서
시트론향 아쉬움을 담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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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11 - 2025 JAN 13th
발행인 김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