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에게
안녕. 새해가 밝았어. 잘 지냈니?
나는 그새 감기에 들어서 연신 코를 훌쩍이는 중. 식사를 챙기고 감기약을 먹고 짧은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하루가 거의 끝나 있어. 이렇게 네덜란드에서의 마지막을 무지렁이처럼 보내도 되나 싶지만 어쩔 도리가 없지. 빨리 낫기를 기대하며 꿀차를 홀짝인다. 건강 조심하렴.
곧 집으로 돌아가. 지금 화병에 담긴 꽃이 시들고 다시 꽃 한 다발을 사다 둘 만큼의 시간, 그러니까 2주 조금 안 되는 시간이 남았어. 작년 이맘때 네덜란드로 출국 준비하던 나는 생각보다 허술해서 거의 직전에 짐을 쌌던 거 같은데, 지금 한국으로 귀국 준비하는 나는, 벌써부터 바리바리 중고 거래 사이트에 다시 가지고 가지 않을 물품을 올렸고, 몇 짐을 택배로 부쳤고, 천천히 방을 정리하고 있어. 긴 겨울 여행을 마치고 암스테르담에 돌아왔을 때 플랫메이트 J는 다시 집에 온 걸 환영한다고 말했는데, 곧 그 집을 떠나야 한다니 기분이 복잡 미묘해.
처음 네덜란드에 도착했을 때 찍은 사진을 돌려 봤어. 아주 낯설고 새로웠던 감각이 다시 떠올라. 몸을 밀어낼 정도로 세게 부는 바람은 처음 맞아 봐서 얼떨떨했어. 좁은 인도를 더벅더벅 걷는데 죄다 자전거를 탄 채로 지나가서 여긴 보행자라곤 없는 곳인가 싶었지. 트램에 타면 모두 나보다 머리 두어 개를 더 얹은 만큼 커서 나무에 둘러싸인 것만 같았어. 슈퍼마켓에선 출구에 영수증을 찍어야 문이 열리는데 그걸 몰라서 쩔쩔매기도 했어. 새로운 나라 새로운 도시에 가면 새로운 삶이 시작되리라는 건 알았지만, 모든 걸 다시 배워야 한단 건 몰랐지. 다시 긴장하고 관찰하고 따라 하고. 어릴 때 아마 수천 번은 반복했을 일을 다시 해야 했지.
뿌리를 내리는 과정은 지난하고 느려서 얼마나 뻗었는지도 잘 느껴지지 않지만, 다시 나 스스로를 다른 토양으로 이주할 때 내가 있던 흙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 알게 돼. 무수히 자란 잎도 다시 지고, 알알이 맺힌 열매도 다시 떨어지지만, 뿌리는 남거든. 내가 얼마나 자랐는지는 줄기가 아니라 뿌리가 말해주지. 맛있는 사과를 기르는 사과나무를 기르기 위해서는 뿌리를 튼튼하게 해야 하는 게 먼저래. 그러려면 처음엔 천천히 자라더라도, 잔병치레하더라도, 스스로 자라게 둬야 한대.
생각보다 나는 암스테르담이란 도시에 깊고 두꺼운 뿌리를 내렸나 봐. 생각보다 네덜란드를 떠나는 일이 힘겹고 슬프게 느껴지네. 지난 첫 학기가 끝나고 플랫메이트가 하나둘 떠나갈 때, E와 H는 뭐만 하면 우리가 __하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구나, 하면서 슬픈 척을 하고는 했는데, 그러면 나는 그만 좀 연기하라면서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지만, 우리 모두 다 끝에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인사했어. 우리 아래 있는 슬픔을 보지 않기란 불가능하지. 그래서 내가 감기에 걸렸는지도 모르겠어. 뿌리를 째로 뽑기는 힘드니까 하나하나 뽑아내는 거지. 천천히 얻은 것과 자란 것, 키운 것을 바라보고, 그러면서 기쁜 슬픔을 느끼는 거야.
미뤄둔 미술관, 박물관을 몇 개 더 가고, 요리할 재료 사러 장을 몇 번 더 보고, 작별 인사를 몇 명과 더 하면, 그러면 이제 그만이야. 아까 먹은 약이 들었는지 목이 덜 칼칼하고 머리도 덜 아프다. 천천히 낫는 중. 천천히 떠날 채비를 하는 중.
이번 주는 일 년 전 네덜란드에서 보낸 첫 주처럼 온갖 곳을 바쁘게 누빌 수 있게 되면 좋겠다. 돌아와 너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고 무슨 일을 벌였는지 얘기할 수 있게 말이야.
(다시) 새해 복 많이 받아.
무탈하렴.
안녕.
추신.
너는 작별을 앞두었을 때 무엇을 하니?
2025년 1월 6일
암스테르담에서
애정을 담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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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11 - 2025 JAN 6th
발행인 김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