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에게
잘 지냈니?
곧 새해가 온다.
저번에 편지를 썼을 때만 해도 베를린이었는데, 그새 드레스덴, 프라하, 빈 이렇게 세 도시를 지나서 지금은 부다페스트에 와 있어. 겨울 여행에 오른 지도 어느덧 열흘이 넘었고 말이야. 돌아보면 베를린에서 편지를 쓴 날로부터 멀리 오지 않은 듯한데, 한편으론 저 멀리 떠나보낸 옛날처럼 느껴진다. 아마 한 해를 끝내는 감상도 늘 이런 식이지? 새해 첫날이 어제 같다가도 아주 먼 과거처럼 와닿는... 이즈음이면 아무리 새해에 감흥 없는 사람이라도 이런 생각을 하기 마련이겠지? 어떤 한 해를 보냈고 또 어떻게 한 해를 보낼 것인지에 관한 생각. 나는 빈 슈테판 플라츠 근처를 거닐면서 눈물이 고인 채로 이런 결론을 내렸어: 우리는 늘 무언가를 얻고 무언가를 잃는 상태에 있는데, 결국 얻어진 것은 언젠가 잃어지고, 잃어진 것은 언젠가 얻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은 언제나 결국 남은 것, 혹은 남아 있는 것이 된다.
프라하에서 마지막에 쉬러 카페에 들렀었는데 급하게 자리를 뜨다가 아끼던 가죽 장갑을 두고 왔었어. 빈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번뜩 생각이 났지. 오슬로에서 샀던 그 장갑은 짙은 갈색 겉가죽과 뜨개질된 특이한 안감으로 돼서 끼고 있으면 어쩐지 멋 부린 기분이 나 좋았거든. 그리고 빈에서는 그 유명하다는 자허 토르테를 먹으러 간 카페에 목도리를 두고 왔단 걸 레오폴드 박물관에 도착해서야 깨달았지. 일단 도착한 김에 전시 구경을 한 뒤에 다시 카페로 돌아갔지만, 습득된 분실물은 없단 얘기를 들었어. 이 년 전 겨울인가 생일 선물로 받은 목도리는, 털보단 면에 가까워서 목을 꽁꽁 둘러싸면 보드랍고 따뜻했는데. 아무튼 아끼던 겨울용품을 둘이나 칠칠찮게 잃어버린 탓에 마음이 꿍해 있었어.
그리고 다시 빈 슈테판 플라츠, 어느 길거리. 장갑도 목도리도 없이 마음이 잔뜩 추워진 채로 길을 걷는데 문득 그날 박물관에서 보고 들은 게 스쳐 지나갔어. 클림트의 그림 <죽음과 삶(Death and Life)>, 그리고 에곤 쉴레의 말 ”나의 존재가 곧 나의 쇠퇴다(My being, my decay)". 나는 그 그림과 말이 꼭 우리는 죽음이 삶을 쫓아온다고 믿지만, 사실은 죽음과 삶은 팽팽히 손잡고 걸어가는 샴쌍둥이 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어.
생각은 돌고 돌아 얻음과 잃음의 관계로 이어졌지. 나는 자라면서 항상 무언가를 잃는 일에 조마조마 해했어. 서울에서 떠나옴으로써 그전의 나를, 나를 둘러싼 삶과 사람을 생활을 잃는 일. 바뀌는 일.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변하는 일. 그런 게 너무나 두려웠어. 내가 그리워도 원해도 되찾을 수 없단 게, 영영 잃어버린단 게 무서웠지. 존재는 허무할 만큼 쉽게 사라지고는 하지만... 그런데 유적은 Ruins 혹은 Remains로 쓰이곤 하잖아. 무너진 것들, 그럼에도 남아 있는 것들.
장갑과 목도리를 잃어버렸지만, 따지고 보면 나는 (아무도 원하지 않았지만) 어느 물건을 다른 장소로 전달하는 배달부의 일을 한 셈인 거잖아. 장갑은 프라하 어느 카페에 또 목도리는 빈의 어느 카페에... 간이 박물관처럼 잠시 전시되어 있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어. 내가 잃었던 것은 그렇게 어딘가에 남아있겠구나. 내가 얻은 것도 그렇게 남아있고 말이야
올해 나는 나 스스로를 서울로부터 떼어내서 암스테르담에 위치시켰지. 그러면서 무엇을 얻었지? 아주 선명하게 남은 기억이 몇 있지. 어두운 밤 숲 속을 나의 자전거 전등이 비추는 친구의 등만 바라보며 페달을 밟은 일. 호수 앞 잔디밭에 드러누워 바로 위를 지나가는 비행기를 본 일. 외계행성처럼 검고 하얀 얼음산 주위를 지나친 일. 다 무너지고 터와 기둥 몇 개만 남은 로마 유적을 본 일.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맛있는 대구요리를 먹은 일…. 그리고 아주 따뜻하고 다정한 마음을 주고받은 일, 작별에도 꿋꿋해질 수 있음을 배운 일, 그리고 사랑하기를 결심한 일. 이렇게 얻은 걸 잃더라도 혹은 잊더라도 나의 남아있는 것들 목록에 있을 테니 걱정되지 않아. 적어도 몇 개는 우리의 편지에 꼬박꼬박 기록되어 있으니 더더욱이 걱정되지 않아.
내일이면 여행을 끝마치고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는 서울로 돌아가지. 집으로, 고향으로, 내가 떠나온 곳으로.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와 잃었는지 점차 선명해지겠지. 올해 끝자락에서 결심하기. 담대해질 거야. 잃음과 얻음이 사실 별반 다르지 않은 거라면, 결국 모두 남아 있는 것들이 되는 거라면, 조금 더 성큼성큼 걸어도 되지 않을까?
돌아오는 해에도 다시 편지할게.
새해 복 많이 받길.
잠시 안녕!
추신.
연말과 겹쳐서 더 큰 슬픔과 애도의 마음이 들어.
애도는 본질적으로 끝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2024년 12월 30일
부다페스트에서
사랑을 담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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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10 - 2024 DEC 30th
발행인 김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