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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욜 MaYol Mar 24. 2024

P선생님, 전상서前上書

mayol@골계전 3. <19금禁>

  내가 더 이상 순진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해준 편지가 있었다.

  순진했다고 착각한 나의 마음에 작은 파문波紋을 일으킨 편지이기도 했다.


  한동안 지방의 모처에 칩거하며 글을 쓰며 지냈었다.

  숙소 인근에는 문을 열고 해질녘까지 창가 자리에 앉아 글을 쓰던 카페가 있었다.

  어떤 날은 가고 어떤 날은 가지 않았지만 우연히도 갈 때마다 마주치는 노신사가 한 분 계셨다. 키는 한 163.74cm 정도 되고 몸무게는 약 53.125kg 정도 나가는 왜소한 몸을 가진 노년의 신사였다.

  내가 글을 쓰고 앉아 있으면 그분은 책장에서 책을 골라 읽거나 노트를 펼치고 붓펜을 꺼내 들었다.

  몇 번 어색한 눈빛을 부딪히고 나자 어느 날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뭐 하시는 분이유?"

  "아, 네. 그냥 글을 씁니다."

  "아하. 그러시고만요. 몇 번 뵙기는 했지만 인사는 처음입니다."


  지금부터 그분을 'P선생님'이라고 불러야겠다.

   P선생님은 학교 교장직을 맡다가 정년퇴직을 했다고 했다.

  앞에 앉으시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지만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서는 바지춤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며 말씀을 계속했다. 아무래도 주머니에 뭐가 들어있던지 허리춤이 좀 큰 모양이었다.

  학교를 나와서 보니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고 그래서 최근에 캘리그래피를 배우고 있다고 하셨다.

  P선생님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가슴팍의 숨을 끌어올려 콧속에 맺힌 끈적한 물을 당겨 먹는 것 같았다.


  "크르윽~ 꿀꺽!"


  그때마다 어깨가 심하게 들썩였다.




  봄볕이 나른하고 시멘트길 위에 핀 아지랑이가 아직 고추 서지 못하고 흐늘흐늘 하던 날이었다.

  며칠 후 다시 카페에 갔는데 미모의 여주인이 봉투를 하나 건네주었다.

  P선생님이 내게 보낸 편지였다.



  새벽잠을 설친 노신사의 편지였다.


   봄볕이 따뜻한 봄날입니다.

   어느덧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 노년의 나이가 되었답니다.
   뒤돌아 보면 후회반 뉘우침반입니다.
   좋은 친구를 둔다는 것은
   값진 인생을 가꾼다는 것입니다.

   - 중략(해독 불가. 캘리그래피를 배운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아니면 너무 예술적이어서인지 편지 내용 중 일부는 지금까지 해독을 못하고 있다.) -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말고
   어진이와 가까이 지내며
   존경할만한 사람을 존경할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법정스님의 '말과 침묵'에서 적어봅니다.
   늘 푸른빛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 2019년 3월 0일 金 4:22 새벽


  필담을 나눠본지가 오래되어서 답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노년의 신사가 잠 못 이루는 새벽녘에 내게 편지를 썼다고 하니 왠지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래서 선생님께 어울릴만한 오래된 원고지를 꺼내어 답장을 썼다.


책상 서랍에 보관한 지 30년도 더 된 원고지에 답장을 썼다. 종이의 거친 질감이 펜촉을 간지럽히며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P선생님 前上書,

    짧으면 詩가 되고
   길면 소설小說이 된다면,
   모든 사람이 다 詩人이 되고
   모든 사람이 다 小說家가 될 터인데,

   詩는 절벽絶壁이고
   小說은 벼랑이니
   Pen을 들고도 말 한마디 적기 힘듭니다.
   더구나 편지는 시나 소설처럼 만들어 낼 수도 없으니 더욱 고약한 일입니다.

   금일 P선생님의 편지를 받아 들고는 생각이 먹먹해지고 값진 人生을 살고나 있는 건지 두려움이 앞섭니다.

   좋은 친구가 사람만이 아니라 빛도 물도 나무도 다 친구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법정스님의 말씀대로라면 제가 P선생님 전에 어진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부디 저의 어리석음은 꾸짖어 주시고 제게는 늘 어진 선생님이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행복하시고,
   뵐 때마다 날로 건강해지시길 기도드립니다.

   2019년 3월 00일 土 21:24
   弟 마욜 올림.


  이렇게 편지를 써서 카페 주인에게 전달했다.

  그 뒤로 또 며칠이 흘렀다.




  카페엘 들어서기가 무섭게 카페 여주인이 반기며 서류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P선생님이 맡기신 거예요."


  루틴대로 내 자리에 앉아 여주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봉투를 열었다가 화들짝 놀라 다시 닫아버렸다.

  카페 여주인도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봉투에서 나온 건 눈을 가늘게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야한 그림이었다.

  카페 여주인을 멀리 밀어보내고 다시 그림을 꺼내보았다.

  그림의 뒷면에는 P선생님의 필체로 아래와 같이 쓰여 있었다.


[성스러운 LOVE STORY]라니. 그림을 꺼내 보긴 했지만 얼굴이 화끈거려 정색하기가 힘들었다. 카페 여주인은 계산대에 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림에 대해서는 이 외의 다른 내용은 없었다.

  굳이 그림을 보고 싶다고들 하시면 보여드릴 수는 있지만 그림을 어디에 숨겨놨는지 찾아봐야 하니 오늘은 보여드릴 수가 없다. 마음 급한 대로 그림을 설명하면, 입술이 빨간 여자가 하늘하늘한 속옷 차림으로 무릎을 꿇고 프레임 밖에서 지켜보고 있는 나를 쳐다보며 바나나를 반쯤 까서 막 입에 문 그림이었다. 먼 하늘에는 새 몇 마리가 날고 있었고.

  마릴린 먼로와 바나나를 합성해 분위기만 연출해 올렸으니 당장은 이것으로 만족하기 바란다.

  선생님이 인편으로 보내준 그림을 보는 내내 얼굴에 홍조가 차 오르고 심장이 벌렁벌렁해지면서 커피잔을 잡은 손이 떨렸다.

  커피잔이 잔받침에 부딪히는 소리가 드러머들의 최고 테크닉의 하나인 '고스트'를 연주하는 것 같았다.

  그날은 글 한 자도 못쓰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노트북과 편지 봉투를 한꺼번에 가방에 밀어 넣고 카페를 빠져나와 버렸다.


  "커피값은 내고 가셔야죳!!"

  "아, 예. 담에 한꺼번에 낼게요."


  민망해서 다시 카페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총총총 뛰어서 셋방으로 돌아왔다.

  옥탑방 책상 앞에 앉아 창가로 들어오는 먼 별이 발사한 빛을 쳐다보며 눈을 감았다.


  '늘 푸른빛을 간직하라시던 분이 갑자기 왜 이런 야화夜畵를 보낸 것일까...'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다가 눈을 뜨니 짙푸른 밤하늘이 보였다.


  '아... 그러셨구나.'


  한눈에 나의 마음 속 깊은 야수野獸를 알아보신 거였다.


  '그래, 기왕 들킨 거 갈데까지 가보자!'


  잠자리를 놓친 새벽, 예의 원고지를 꺼내 꾹꾹 눌러 답장을 썼다.


    P선생님 前上書,

    보내주신 그림 잘 받았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토록 정갈한 그림을 처음 대하는 저로서는 심히 당황스럽고 낯빛마저 붉어져서 차마 앉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거렸습니다.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기어 나와 한동안 할 일 없이 낙원을 거닐고 있었답니다.
   그러다가 무료함에 퍼자고 있던 아담을 꼬여 선악과를 따 먹게 한 결과로 우리의 치부가 빨갛게 드러나고 말았으니, 원숭이 x구멍이 무색할 지경이 되고야 만 이야기가 그림 속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단 한 장의 그림만으로도 저에게 큰 깨달음을 주시는 선생님의 혜안과 가르침에 감동하여 이 편지를 쓰는 내내 마음이 요동치고 기운이 불끈 솟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선생님의 학식과 견문으로 보아 이 그림이 한 점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고 필시 시리즈를 가지고 계실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며 다시 한번 선생님이 계신 곳을 바라봅니다.

   어차피 한 세상,
   부디 혼자만 향유하지 마시고 제게도 선악과를 먹여주시길 시방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弟마욜 올림.

 

  그런데 그게 끝이었다.

  P선생님의 자상한 편지가 인편을 통해 몇 번 더 왔었지만 더 이상 그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월세방 계약도 다 끝나서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P선생님과 얼굴이 화끈해지는 그분의 그림이 떠올랐다.

  불만 붙여놓고... 정말 치사한 일이다.

  집도 모르고 전화번호도 모르고... 카페도 문을 닫아 버렸고... 어우, 답답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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