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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욜 MaYol Mar 17. 2024

소나기와 점순이

mayol@골계전 2.

  내게는 '점'에 대한 아주 특별한 추억이 하나 있다.

  추억을 떠올리려니 '점'에 관한 한 두번째 라면 서러워할 작가 한 명이 있어 먼저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녀의 이름은 ⌜쿠사마 야요이⌟다 .

  얼마 전에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 한 점이 경매에 올라왔다는데, 경매 시작가가 40억 원이라나 하면서 호들갑스럽게 홍보를 하던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돈이 있었다면 경매에 참가했겠지만 처지가 그렇지 못하니 한숨만 나올밖에.

  어쨌거나, 아사히상과 프랑스 예술문화훈장을 수여한 일본 최고의 작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녀는 ‘강박적 점순이’였다.

  어쩌면 그렇게 강박적이었기 때문에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될 수 있었던 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강박증과 정신착란 증세가 만들어낸 땡땡이 무늬가 사람들을 치유하고 행복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의아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가진 아름다운 점순이, 그녀가 바로 쿠사마 야요이인 것이다.

  그런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점을 본 건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에서가 아니었다.



 

  아동문학가 정채봉이 죽은 그 이듬해인가, 모두가 휴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 늦여름, 나는 해남을 떠돌고 있었다.

  땅끝에서 배를 타고 보길도에 들어가 고산 윤선도의 정원에 앉아 있었다.

  식사를 거르고 정원을 산책하면서 그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렀을지 그리고 그의 싯구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새삼 되새김질 하며 호젓한 시간을 가졌다.

  해가 지기 전에 윤선도의 사당 앞에 있던 작은 슈퍼마켓에서 간단한 먹거리를 구입해 마켓 2층의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지샜다.

  창밖으로 어둑하게 다가오는 고산의 정원을 바라보며 컵라면을 끓여 먹었던 기억이다.

  이튿날 아침, 바지선에 차를 싣고 다시 해남으로 나왔다.

  주변에는 누렇게 벼가 익어가고 있었고 한 떼의 잠자리가 운전을 방해했다.

  잠자리 떼가 걷힌 산 중턱에는 살아생전 정채봉이 예찬하고 즐겨 찾았다는 미황사가 바다를 향해 서 있었다.

  노을빛을 받은 미황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 극찬을 했던 정채봉의 이야기가 떠올라 찾아가는 길이었고 이를 눈치챈 잠자리 떼가 마중을 나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도 빠졌다.

  일찍부터 보길도를 빠져나오느라 밥을 먹지 못한 나는 공복에 지쳐서 미황사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알카트래즈섬을 탈출한 빠삐용의 허기진 뱃속과 비슷했다.

  미황사에 들어가기 전에 빈속을 채우려고 경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깔고 앉아 배낭에서 먹을 것을 찾았다.

  비상용 생쌀과 버너 그리고 코펠과 퀄컴사의 최신식 벽돌폰이 배낭에서 나왔다.

  피로에 지친 나는 파란 하늘을 보며 벌러덩 드러누워 벽돌폰에 얼굴을 기댄 채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밥 어떻게 하는 거야?"

  "근처에 물은 있니?"

  "안 보이는데?"

  "그럼 방법 없다. 뚜뚜뚜뚜…"


  파란 하늘빛에 놀라 눈가로 굴러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얼마나 파랗고 아름다운 하늘이었는지.


  '그래, 굶어 죽기 딱 좋은 날씨야...'


  그렇게 저 멀리 구름 한 점을 장식용으로 달고 있던 파아란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있을 때였다.

  파랗던 하늘에 마치 누가 찍은듯이 아주 작은 점 하나가 갑자기 나타났다.

  '어? 마른하늘에 뭐지?' 싶어 미간을 찌푸렸다.

  초점을 맞추려고 해도 잘 맞춰지지 않던 점 하나는 순식간에, 두 개 열 개 백 개 만 개 수백만수천만 수억 개로 불어나고 있었다. 마치 단세포 생물이 빠른 속도로 증식을 하는 것 같아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엄청난 광경에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눈을 깜빡거리며 순식간에 하늘을 꽉 채운 셀 수 없이 많은 점들을 바라보았지만 어느 하나의 점에도 시선을 고정할 수가 없었다.

  점들은 불과 몇 초도 안 되는 사이에 코앞에 까지 다가와 있었다.


  "쏴아~~"


  소나기였다.


  '엄마야~'


  꺼내놓았던 벽돌폰이며 버너 코펠 쌀 등을 배낭에 허겁지겁 챙겨 넣고 미황사 경내로 뛰어들어갔다.

  개미 몇 마리가 경내에 깔린 모래와 함께 빗줄기에 퉁겨져 나가는 게 보였고 처마에는 이미 빗물이 고여 떨어지고 있었다.

  비는 한참을 더 내렸다.

  빈대떡과 막걸리를 상상하면서 툇마루에 앉아 사람 하나 없는 경내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비가 그치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보수 공사가 한창이었다.

  한동안은 공사를 더 해야 한다는 스님의 말을 듣고는 절을 빠져나와 배낭을 던져 싣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나는 아직도 노을빛을 받은 정채봉의 미황사를 제대로 본 적이 없고 다시 가 볼 계획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다. 단지 그곳에서 보았던 수많은 점들을 추억할 뿐이다.

  처음 본,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수많은 점들, 내가 본 가장 아름답고 강렬했던 점들이었다.

  그리고 그날의 점들을 떠올리면 점순이 쿠사마 야요이가 입술로 뾰족하게 세운 실 끝처럼 추억 속을 파고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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