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의 마지막 행로
딸의 결혼을 계기로,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산수골로 내려왔다.
“수녀님이 지으신 산수골 나의 집.”
그 집은 원래 수녀님들이 노후를 위해 마련했다가 어떤 목적아래 처분하게 된 공간이었다.
사연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형연할 수 없는 감사와 기쁨을 느꼈다.
수녀님께서 지은 집이라니!
그 덕분에, 시골 생활의 첫발은 두려움보다 설렘에 가까웠다.
감사한 마음을 보답하고 싶어 근처 자애원을 찾아 자원봉사를 시작했고, IQ 70 남짓한 청년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그들과 웃고 떠드는 시간은 오히려 나에게 감사와 치유의 시간이 되었다.
이주 2년 전, 어머니는 안마침대에서 내려오시다 낙상을 당해 고관절이 부러졌다.
93세까지도 왕성하게 움직이시던 분이셨기에,
나는 방심하고 있었다.
“난 병력난에 쓸 게 하나도 없네”라며 시신 기증 서류에 사인하시던 분이었다.
건강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던 어머니가, 이렇게 작은 사고에 무너지실 줄은 몰랐다.
다행히 94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수술은 잘 되었다. 하지만 예전처럼의 외부 활동엔 제한이 왔고 , 점점 생활 반경은 좁아졌다.
산수골로 내려온 것은 우리에게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어머니는 보행기를 짚고 마당을 거닐며 가끔씩 벤치에 앉아 쉬시며
채마밭을 흐뭇한 눈으로 둘러보셨다.
그런 시간들을 많이 좋아하셨다.
전에는 그림에 매달려 같은 집에 살아도 얼굴을 마주하기 어려웠는데,
이곳에서는 달랐다.
나와 어머니,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비로소 우리에게 ‘허니문’ 같은 시간이 펼쳐졌다.
그렇게 엄격하고 꼿꼿하시던 어머니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차 부드러워지셨다.
종이호랑이가 되시더니, 이제는 예쁜 아기가 되어 곁에 계셨다.
웃음도 많아지고, 인지 상태도 비교적 좋으셨지만
가끔은 TV 속 장면을 현실로 받아들이기도 하셨다.
내가 “엄마, 나 누구야?” 하고 장난을 치면 수줍게 웃으며 “얘는…” 하고 머뭇거리셨다.
그 모습조차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그러나 누워 계시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나를 볼 때마다 아기처럼 손을 내밀며 안아 달라는 제스처를 하셨다.
속으로는 ‘나 어릴 때는 안아주지도 않으셨으면서…’ 하며 퉁을 떨었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안아드렸다.
그때마다 환하게 웃으시는 얼굴은 내게는 큰 기쁨을 주었다.
음식을 잘 넘기지 못하셨지만, 마당에서 딴 홍시를 드리면
“옛날 어릴 적에 먹던 그 맛이다 얘...” 하시며 맛있게 드셨다.
나는 왠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한 달여 동안을 어머니 곁에서 함께 자며 손을 잡아드리곤 했다.
친척들에게 연락해 마지막 인사를 드릴 기회를 마련했고, 주말이면 배불뚝이가 된 딸과 사위가 찾아왔다.
서아의 초음파 사진을 보신 어머니는 활짝 웃으시며 “참 좋은 세상이다”라고 하셨다.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환한 마지막 웃음!.
손주 사위가 발마사지를 해드리자 “사람이 참 좋다.”라는 말씀도 하셨다.
아들을 보실 때는 눈빛이 더욱 반짝였다. 아마도 아들의 얼굴에서 젊은 시절 아버지의 모습을 보신 게 아닐까?
아들은 어린 시절부터 기꺼이 할머니의 ‘애인’이 되어주었다.
딸네가 돌아가려 하자 어머니는 침대를 올려 일어나 앉아 하염없이 손을 흔들고 계셨다.
이미 현관으로 나서 보이지도 않는데 계속 흔드셨다.
딸은 그 말을 듣고 다시 들어와 할머니를 꼭 안아드렸다.
아무도 그날이, 그 포옹이 마지막 인사가 될 줄 몰랐다. 심지어 나 까지도.
사흘 전까지도, 어머니는 일어나 목욕을 하시고,
“빨리 집에 가야 한다”며 동전이 가득한 주머니들도 챙겨 놓으셨다.
그 모습을 난 간과해 버린 것이다. '노잣돈이라도 챙기셨던 걸까?'
이튿날 월요일 아침. 문득 ‘미리 종부성사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게 신부님을 모셨고,
어머니께는 “병자성사”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신부님을 반갑게 맞으시며,
기도를 받으시고, 영성체까지 모시고 난 후, 신부님 앞에서 고요히 눈을 감으셨다.
거친 숨 한 번 없이,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하듯,
그렇게 하늘나라로 발길을 옮기셨다.
향년 96세. 2012년 11월 26일 오전 10시, 위령성월의 마지막 주간이었다.
나는 통곡 대신 “엄마, 축복받으셨어요”라는 말만 반복했다.
어머니의 한 세기.
어머니의 삶은 한마디로 파란만장이었다. 그 시대의 모두가 그러하셨던 것처럼.
대동아 전쟁, 일제 강점기, 6·25 전쟁까지.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내셨다.
결혼 전에는 신여성으로 교편을 잡으셨고, 전쟁 중에는 남매를 잃는 큰 아픔도 겪으셨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안정된 교사의 길을 내려놓고 세상에 뛰어드셨지만,
삶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와중에도 어머니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은행에 가시면 직원들에게 은행의 역사 공부를 시키셨고,
길에서 담배꽁초를 버리는 청년이나 흉기를 든 아이들을, 불러 세워 꾸짖으셨다.
다방의 일본식 장식품도 못마땅해 그냥 넘기지 못하셨다.
반면, 사람들이 줄을 서고 질서 정연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시면 눈시울을 붉히며 “이제야 세상이 달라졌다. 우리 국민 만세다.”라고 격하게 칭찬하시는 등 일화는 너무나 많다.
독립운동을 하셨던 외삼촌들의 영향을 받은 어머니는 뼛속 깊이 애국자셨다.
80세가 넘어서까지 거리가 먼 고아원 원장직을 맡아 아이들을 돌보셨다.
장기 기증이 어렵다 하자 “그럼 시신이라도 기증하겠다”며 결단을 내리셨다.
나는 반대했지만 어머니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결국 어머니의 마지막 봉헌을 지켜드렸고,
지금은 용인의 참사랑 묘역에 계신다.
봉헌으로 마무리된 삶
어머니는 질곡의 세월을 굽힘 없이 살아내시고, 신부님 앞에서 은총 속에 떠나셨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신답게,
축복받은 모습으로. 그 감동을 안고 나 또한 시신 기증에 동참했다.
어머니의 삶은 내게 큰 가르침이었다.
엄격함과 강건함, 그리고 마지막 순간의 온화함까지. 한 세기를 살아내신
당신의 행로는
나를 한없이 겸손하게, 또 단단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