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쫄보의 승마 체험기
스무 살, 내가 승마를 처음 하게 된 곳은 중국이었다. 당시 해외 선교로 중국 오지 마을에 갔다. 그곳에서 이름 모를 흙산을 5시간 넘게 올랐다. 한여름 땡볕에 나무 한 그루 없는 산을 힘겹게 올라갔다. 말의 등에 산 꼭대기 마을 아이들에게 나눠줄 선물이 한가득 담긴 짐을 싣고, 사람들은 모두 걸어서 산에 올랐다. 말 네 마리, 사람 열다섯. 가도 가도 끝없는 길을 걷던 나는 정신이 핑 하고 돌더니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잠시 실신한 것이다(그때는 지금보다 체력도 약하고 몸무게도 10kg은 덜 나가던 시절). 깨어난 나는 한 마리의 말에 몸을 실었다. 말은 나를 태우고 절벽 같은 산을 성큼성큼 잘도 넘었다. 경사가 너무 가팔라 뒤로 고꾸라질 것 같았지만, 나는 용케 버텨냈다. 그렇게 무사히 산 꼭대기까지 말을 타고 올라갔다. 야생에서 배운 첫 승마였다.
절벽 오른 경험도 있는데, 평지 걷는 것쯤이야
키르기스스탄에서 말을 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상하리만치 자신감이 샘솟았다. 사실 이날 우리가 계획했던 일정은 스키와 트래킹이었다. 하지만 날이 따뜻한 탓에 이날 스키장이 운영을 중단했다. 스키복까지 잔뜩 챙겨 온 이들에게는 아쉬운 순간이었다. 비록 스키는 못 탔지만, 새로운 모험을 위해 모두 승마 체험을 하기로 했다. 식당 밖으로 나오니 다양한 말들이 전통 문양의 안장을 입고 눈을 끔벅이며 서 있다.
나는 일행을 모두 보낸 뒤 가장 큰 백마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승마를 우습게 봤다가 큰코다쳤다. 맞다 나는 쫄보였다. 지금은 운동선수 뺨치는 피지컬이 됐지만 사실 난 왕쫄보다. 내가 너무 무겁지 않을까 긴장한 탓에 말 위에서도 삐걱삐걱 몸이 말을 안 듣는다. 말에 오르는 것도 무서웠고 말의 고삐를 혼자서 잡고 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결국 현지 가이드가 이끌어주는 말에 올라 30분가량 되는 내리막 코스를 달렸다.
“츄츄~” 말을 달리게 하는 소리를 내본다. 불안한 마음에 고삐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땀이 쥐어진다. 굽이굽이 이어진 언덕길을 따라 말발굽 소리가 이어진다. 초원을 향해 말이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하필이면 내가 고른 말이 가장 크고 건강한 말이라 나와 함께한 말은 앞서가던 다른 말들을 제치고 선두까지 성큼성큼 내달렸다.
무섭고 불안한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익숙해지자, 탁 트인 설원이 시야에 담긴다. 사람의 흔적 하나 남지 않은 깨끗한 눈길 위에 말의 발자국이 하나둘 찍힌다. 말이 한 걸음씩 발을 뗄 때마다 사각사각 눈이 밟히는 소리가 더해진다. 말의 숨소리와 말발굽 소리에 맞춰 호흡하다 보면 자연과 하나 되는 느낌에 빠져든다. 고요한 초원에 나와 말의 숨소리만 울려 퍼진다.
감상도 잠시. 내 말이 선두를 달리자 고삐를 같이 잡고 같이 뛰던 현지 가이드도 힘이 들었나 보다. 길을 걷다 중간에 포기를 선언하더니 직접 고삐를 잡으라고 건넨다. 나는 격하게 머리를 저었다. "노노~ 무서워요!!" 행여 날 두고 갈까 봐 슬픈 눈으로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며 애타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지쳐서 숨을 고르던 모습에 미안했지만, 지금은 내 코가 석자다. 가뜩이나 힘 좋고 건장한 말인데... 혼자 달렸다가는 초원을 무방비 상태로 내달릴지도 모른다. 혼자 고삐를 잡고 말을 몰며 초원을 멋지게 내달리는 칭기즈칸이 되고 싶은 마음은 딱히 없었다.
키르기스스탄에서 두 번째 승마는 총케민의 광야 같은 설원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줄지어 달리는 말들. 이탈하는 말들이 없도록 말을 몰아주는 셰퍼드 세 마리와 함께였다. 전날 승마의 맛보기를 했던 덕분일까 승마에 조금 자신감이 붙어 오늘은 혼자 고삐를 잡았다. 아니 사실 모두가 혼자서 말을 탔다. 현지 가이드 분들이 우리 일행의 맨 앞과 뒤에서 우리를 지켜주고 계셨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말에 오를 때부터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왕복 1시간이 넘는 코스. “츄~”하는 소리와 함께 발로 말의 옆구리를 치면 말은 빠르게 달린다. “드르르르~” 소리를 내며 고삐를 당기면 말의 속도가 잦아든다. 전날 가이드분이 이끌어주셨던 것과 달리 내가 고삐를 잡자, 말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내가 탄 말은 청소년? 쯤 되어 보였는데 솔이가 탄 말과 형제인지 연인인지 계속 붙어가고 싶어 했다. 솔이가 탄 말이 달리면 덩달아 빨라지고, 솔이가 탄 말이 멈추면 같이 멈췄다. 언제 뛸지 몰라서 불안한 마음에 고삐를 힘껏 쥐었다.
눈 덮인 산을 굽이굽이 내려갔던 전날과 달리 이곳의 풍경은 또 달랐다. 광활한 설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고, 저 멀리 평야에서 말을 탄 무리가 멋지게 내달려왔다. 영화 속에서나 볼법한 광경이었다. 다들 자유롭게 말을 타는 모습을 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안개가 아스라이 낀 설원에서 우리 일행도 점점 산속으로 향했다.
전날과 달리 오늘은 이상하게 말을 타는 자세가 불편했다. 말이 달리면 엉덩이를 쿵쿵 찧었다. 달리지 말라고 연신 "드르르르~"를 외쳤는데 내 발음이 잘못되어서일까. 너무 한국식으로 정직하게 "드! 르! 르! 르!"를 외쳐서일까. 컨트롤이 안 되는 말 때문에 몸은 점점 더 굳어갔다. "제발 멈춰줘!!"
승마를 즐기기에 나는 여유 따위는 없는 겁쟁이였다. 승마는 귀족 스포츠라는데 나는 전생에 귀족은 아니었나 보다. 결국 나는 이날 1시간 남짓 되는 승마로 인해 왼쪽 목부터 어깨까지 담에 걸렸다. 남은 일정 내내 나는 로봇처럼 목에 힘이 주지 못하는 환자가 됐다. 누워서 몸을 일으킬 때도 머리를 받쳐줘야 하고 옆을 보기 위해서는 몸을 옆으로 돌려야 했다. 아픈 것은 둘째치고 내 모습이 초라하기도, 우습기도 했다. 일주일 동안 고통은 지속됐다.
그럼에도 그곳 그 시간에 돌아가면 승마를 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YES!"다. 말을 타고 보는 풍경은 차를 타고 보는 풍경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곳의 공기와 바람. 자연과 하나 되는 기분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었다. 칭기즈칸처럼 내달리지 못해도 줄지어 걷기만 하는 승마라도 좋았다.
하지만 다시 한번 키르기스스탄을 찾는다면...?
승마를 하게 될까? 그건 고민을 좀 해봐야 할 것 같다. 나와 교감할 수 있는 말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고 말을 믿고 몸을 맡기는 것도 중요하다. 결국 말이든 사람이든 마음이 통해야 서로를 이해하고 온전히 하나 될 수 있는 것 같다. 이번 여행에서는 교감이 안되어서 말도 무거운 나를 태우고 걷는 그 길이 꽤나 힘들었을 것 같다. '다음엔 좀 더 마음을 열고 타볼게 미안하고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