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씩 전화하기가 어려워서 글로 남겨. 난 잘 지내고 있어. 지금은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서 방에 히터를 틀고 자. 한국은 벌써 여름이 왔다고 하더라. 하긴 작년 5월도 더웠던 거 같아. 요즘 지내는 건 어때? 나는 매일 다른 하루를 보내고 있어. 아침 6시에 일어나서 7시 반까지 출근해서 8시간 동안 키위를 포장해. 개발하다가 단순작업을 하니까 너무 웃기더라. 이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 싶어서 옆에 있는 사람들한테 전부 말 걸고 있어.
어제는 키위 친구랑 얘기하는데, 나한테 What are you looking for?이라고 하더라. 그러게, 난 뭘 찾고 있는 걸까. 나는 emotion이라고, 살면서 여러 감정을 느껴보고 싶다고 말했지만 이마저도 속 시원하게 대답한 건 아니었어. 친구는 Passion이라고 하더라. 이제껏 뭘 하면서 열정을 느껴본 적이 없대. 생각해 보면 나도 뭔갈 하면서 미친 듯이 해보고 싶다는 갈망을 느껴보진 못한 거 같아.
내가 왜 워킹홀리데이를 왔는지 알아? 대충 사람들한테는 다른 직업을 경험해 보고 싶다고 짤막하게 대답했지만, 사실은 내 정체성과 관련이 있어. 난 고등학생 때, 어쩌면 중학생 때부터 '대체 왜?'라는 생각을 매일 하고 살았어. 너희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고3 때 자퇴하고 싶다고 했었어. 공부할 이유를 모르겠는데 계속 수능 준비하라고 하니까 몸이 안 따라주는 거야. 그래서 겉핥기식으로 공부하다가 재수를 했지. 대학생이 되어서 성적은 좋았는데 내적인 성장은 하지 못했어. 난 4년간 학교 다니면서 공무원이 될 줄 알았어. 앞으로 돈을 어떤 직업으로 벌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만 했어. 지금까지 사는 내내 마음이 꽤 불편했어. 바다 보면 속이 뻥 뚫리는 거 같다고 하잖아, 난 그냥 평상시에도 잔잔하게 꽤 시원했으면 좋겠는데 출근하기 전에 다시 어두워지는 내가 싫었어. 그래서 답답해서 나왔어.
그래서 나아졌냐,라고 하면 정서적으로 정말 많이 좋아졌어. 효율성이란 찾아볼 수도 없는 일을 하는 게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일이 너무 쉬우니까 사람들이랑 얘기하기엔 좋더라고. 나에게 필요한 건 대화였어. 말을 하면서 스스로 깨닫는 순간들이 있잖아. 이게 너무 필요했는데 지금까지 생활하면서 일 관련된 거 빼고는 말해본 적이 별로 없었더라고. 사실 우리끼리도 너무 사랑하지만, 각자 사느라 바빠서 서로가 뭘 하는지 잘 모르잖아. 가끔 만나서 있었던 얘기를 하긴 하지만 정말로 방구석에서 혼자 고민하는 걸 얘기할 시간이 없었지. 난 이런 질문에 답을 내리고 싶어서 이런저런 책을 읽었는데, 결국 내린 답은 글을 읽는다고 나는 어떤지 표현할 순 없다는 거였어.
우리나라는 150km/h로 달리는 고속도로에 있는 거 같아. 유럽권 사람들은 강변 옆에서 달리기를 하는 거 같고. 도로 위에서 갑자기 자동차 문을 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양옆을 볼 세도 없이 그냥 앞으로 쭉 나가고 있어. 근데 내가 왜 달리는지는 모르고 길이 나있으니까 일단 가긴 가는 거야. 흠, 근데 운전을 하다 보면 중간에 나가는 길도 있잖아. 그러면 작은 동네가 나오고 차를 멈출 수 있잖아. 그런 것처럼 혹시나 너희도 나 같은 감정을 느꼈다면 잠깐은 다른 걸 해봤으면 좋겠어. 사람 사는 게 정말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부턴 이상하게 현자가 된 것처럼 마음이 훨씬 나아지더라.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고 그냥 그렇구나, 하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돼.
어제부터 세계지도 그리기를 시작했어. 이 세상에 많은 나라가 있다는 건 알고는 있지만 어떤 나라가 어디에 있는진 몰라서 그려봤어. 너희는 어렸을 때 지구본을 자주 봤어? 나한텐 그저 기념물이었거든. 나라 수도 맞추기 게임하면 하나도 모르고 궁금해하지도 않았어. 알아봤자 세상 사는 데 도움도 안 되는데 뭐 하러? 이런 식이었지. 요즘에는 직장 동료들이랑 얘기하다가 알게 된 거 AI한테 물어보면서 역사 공부를 하는 재미에 빠졌어. 역사적 배경이 사람들의 행동방식, 음식, 경제 흐름을 만들어냈다는 걸 발견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별똥별이 하나 지나가는 거 같아.
뉴질랜드 워홀이 끝나면 뭘 하고 싶냐는 질문을 되게 많이 받는데, 1년은 좀 짧은 거 같아서 다른 나라를 가려고 해. 아마 호주나 아일랜드를 갈 거 같은데 잘 모르겠어. 어쩌면 갑자기 스페인으로 갈지도 몰라. 프랑스나 이탈리아가 될지도?
지금 부딪힌 현실적인 문제는 많아. 일단 오늘 아침에 감자를 삶아서 오븐에 넣어뒀는데 글 쓰다가 까먹어서 방금 다 태워먹었어. 김치 1kg을 샀는데 일주일 만에 다 먹어서 또 사러 가야 해. 근데 500g에 7,200원이야. 매일 나를 위한 아침, 점심, 저녁, 간식을 준비해야 해. 한국에선 부모님께서 반찬을 한 달에 한 번씩 보내주셨거든. 아시안 마트는 내가 사는 곳에서 차 타고 40분 정도 가야 있어. 저번 주에 더 살 걸... 바보같이 하. 이번 주면 키위 시즌이 끝나서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해. 분재하는 게 재밌어서 식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은데 잘 될지 모르겠네.
돈을 많이 모으진 못했어. 렌트비로 주에 $150(대략 13만 원)씩 나가고 식료품도 기름값도 한국보다 비싸. 아껴보려고 출퇴근할 때는 프랑스 친구랑 같이 차 타고 다니고, 외식은 거의 안 하고, 커피도 잘 안 사 먹고 있어. 아무리 이렇게 해도 궁금한 건 다 해보니까 돈을 아끼기엔 무리가 있더라고. 그래서 그냥 약간은 마음을 놨어.
영어는 한국에 있을 때보단 훨씬 좋아졌어.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상황 설명하면서 전달하려고 악바리를 쓰거든. 근데 그렇다고 어휘력이 좋아진 건 아니야. 한국에 살면서도 공부 안 하면 같은 말만 쓰는 것처럼. 하루하루 전보단 나아지는 거 같은데, 아직 일취월장은 아니다.
어제 일하다가 생각한 건데, 사람들은 즐거움을 느끼고 싶어서 무언가 계속하려는 거 같아. 흠, 내가 볼 땐 노는 법을 모르는 거 같아. 즐겁고 싶은데 뭘 해야 할지 모르니까 술을 마셔서 빨리 기분에 젖으려고 하는 것도 있는 거 같아. 내가 그랬거든. 너희들의 취미는 뭐야? 요즘 나의 새로운 재미는 퇴근하고 숙소에 있는 친구들이랑 같이 떠드는 거야.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재밌어. 어제는 아시아를 종이에 그려봤고, 역사 공부도 조금 했어. 앞으로는 영어로 된 세계사 책을 읽어보고 싶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인생의 속도는 너희가 조절할 수 있어.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지나가는 거 같아도 내가 벅차고 힘들면 천천히 가도 괜찮아. 빠르고 느리다는 표현은 어떤 상대에 비교해서 나오는 표현이잖아. 이 비교 대상이 남들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되었으면 좋겠어. 다 좋은 것도 없고 다 나쁜 것도 없더라.
아, 얼른 집 가서 밥 먹고 싶다. 밥은 잘 먹고 다니지? 건강이 최고야. 보고 싶다.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