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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간 한국인 없이 살기

by 헬렌

뉴질랜드 시골로 왔다. 내 머릿속은 아직도 한국어로 혼잣말을 하는데, 주변에 들리는 한국말은 없다. 우리는 각 나라의 억양을 달고 영어로 말한다. 소리보다 감정이 앞서서 단어를 뭉개버리기도 한다. 눈빛으로 의미가 전해졌는지 어떻게 산다.


처음에 뉴질랜드에 왔을 땐 한국 커뮤니티에 의존했다. 누군가 나와 행선지가 겹치는 거 같으면 만나려고 했다. 사실 졸졸 따라다니고 싶었다. 엄마, 저 좀 살려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막 태어난 아이가 면역력이 없듯, 나는 모든 것에 예민했다. 대형마트인 PackNSave에 가서 돼지 허벅지만 한 고기를 보고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던 그때가 아직도 떠오른다. 5개월이 된 지금은 주변에 양떼가 있어도 사진 찍지 않는다.


남섬 크라이스트처치에선 한국인으로 둘러싸인, 멀리서 보면 한국 같은데? 할 법하게 살았다. 키위잡을 구하지 못해서 한식집과 치킨칩에서 일하고, 렌트비를 아끼려고 한인 플랫에 들어갔다. 하루를 보내면서 무언가 하긴 했지만, 침대에 누웠을 때 나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했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대단하지, 편안함을 즐길 법도 하지 않나?' 나에게 행복을 선물한 척, 이불속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현실을 회피했다.


뉴질랜드에 온 지 2개월이 지나도 난 바뀐 게 없었다. 한국에서 멀리 여행 온, 영어 못 쓰는 어르신 같았다. 은퇴한 것처럼 지내고 있길래, 배낭여행 온 이방인으로 컨셉을 바꾸었다. 3월부터 와이너리 시즌이 열린다는 말 하나만 믿고 블레넘으로 이동했다. 와인엔 관심도 없었다. 어디선가 한국에서 해보지 못할 법한 걸 해보고 싶었다.


주 6일, 오후 7시부터 12시간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되었다. 금요일 아침 11시까지 맥주를 마셨고, 7명이 모여 자전거를 타고 와이너리 투어를 가고, 불 다 꺼진 공원에서 와인을 각 1병씩 하면서 만다린에 속한 나라를 얘기했다. 출퇴근할 땐 포옹하고 안부를 묻느라 15분씩 썼고, 쉬는 날에 뭘 했는지 말하느라 1시간을, 유럽의 역사를 배우고 우리나라의 문화를 전하느라 두 달을 썼다. 내가 할 수 있는 한국말은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추워, 배고파, 더워, 앗 뜨거워" 정도였다.


옆에서 하는 말을 못 알아들을 때가 대다수였다. 실시간 미드가 눈앞에서 방영됐다. 상대가 정말 화를 내고 있는 건지, 진지한 말을 하는 건지, 뭘 비꼬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남들 따라 웃는 것도 힘들었다. 내가 택한 건 일단 그냥 듣는 거였다. 끄덕이고 아, 감탄사로 반응했다. 그리곤 나중에 아일랜드 친구에게 가서 무슨 얘기를 한 거냐고 다시 설명 들었다. 나의 해설지였다.


가지각색의 영어를 듣는 건 복잡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억양을 익히는 데 시간이 걸렸고, 이 와중에 성격을 파악해야 했다. 처음엔 아, 듣기 너무 어렵다 싶었는데, 돌아보니 남들에게 내가 말하는 건 얼마나 기괴하게 들렸을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 같았을까?


한국어 같은 영어를 쓰는 내 말을 들어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말 감사했다. '엄마'라고 말하기 시작하려는 아이처럼 내가 기특했나 보다. 이들 덕분에 사람이 없어서 외로웠던 적은 없었다. 난 꽤나 잘 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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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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