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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 때려치우고, 뉴질랜드 5개월

by 헬렌

개발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정확하겐, 공부하려는 의지가 부족했다. 남들은 주말에 강남 스타벅스에서 모각코(모여서 각자 코딩하기)를 하고 있을 때, 난 망원동 독립서점에서 신간 서적을 보고 있었다. 사람엔 관심이 없지만, 사람이 만들어낸 업적엔 놀라곤 했다. 어떻게, 왜? 뭐가 좋아서 그렇게 했을까? 나에겐 '동기부여'라는 꼬리표가 떼어지질 않았다.


다들 뭐가 그렇게 좋은지, 계속 무언가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나도 남들에겐 '열심히 사는 애'였다. 그러나 내 모습이 나에겐 잘못 박은 못에 망치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니까 이걸 왜 하는 건데?' 회사생활 2년간 이 질문은 짙어졌다.


책을 100번 읽어봤자 질문에 답을 못할 거 같아 뉴질랜드에 왔다. 버킷리스트엔 일과 관련된 건 없었다. 스카이다이빙, 네비스스윙, 번지점프 같은 액티비티는 내일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꼭 해봐야지,라고 했으면서. 일에 대한 취향은 몰랐다. 그래서 일단 뭐든 해보라는 어른들의 말을 들었다.


11월 말 입국. 내가 보기엔 일하기 제일 안 좋은 시기였다.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 사람들은 일찍부터 연휴를 준비했다. 한국은 빨간 날에 장사가 제일 잘 되지만, 반대로 여긴 배짱 장사라고 해야 하나, '내가 문 열 때 네가 오면 되잖아.' 이런 식이다. 2월까진 '내가 아는 뉴질랜드는 양이 뛰어노는 곳인데? 이런 데가 아닌데?' 하다가 지나갔다. 잠깐 한국 식당에서 일을 했으나 '이걸 하려고 온 게 아닌데?' 싶어서 그만두고, 3-4월엔 와이너리에서 25개국에서 온 친구들을 만나며 "와, 모든 사람이 전부 다르구나." 감탄하다가 끝났다. 5월엔 키위 할머니랑 살며 '설거지하고 안 헹궈도 사는 데 지장은 없구나.' 놀라며, 그녀와의 대화로 사는 법을 배웠다. 지금은 키위 포장한 지 이틀 됐는데 언제 때려치울지 고민하고 있다.


또다시 시작됐다. '다음엔 뭐 하지? 난 뭘 좋아하지?' 질문에 정확한 답은 없으나, 질문으로 시작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었다. 아침 7시부터 적은 내 종잇장엔 '좋아하는 일을 정신없이 하고 싶다.'라는 말로 시작했지만, 결론은 달랐다.


- 노트 일부

키위 할머니댁에서 화분에 꽃을 심는 게 제일 재밌었다. 힘이 많이 들지 않고 몸을 움직이며 꽃을 배울 수 있었다. 돌아보면 개발하는 게 꽤 좋았으나,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고 일하는 게 나랑 맞지 않았다. 웬만한 일은 앉아만 있거나 서있기만 한 일이라 중간 지점을 못 찾겠다. 하루 4시간만 개발할 수 있나. 개발하고 글 쓰고 꽃 심는 성은지.

... 하고 싶은 일은 내가 찾아야 하는데 정작 나는 돈을 좇아 내 꿈을 미뤘으니, 미련하다. 이래서 돈을 못 모았나? 정말 좋아하는 걸 찾으려 하지 않은 죄로 이렇게 당한 건가.


뉴질랜드에 온 목적은 돈이 아니라 내가 뭘 좋아하는지 찾는 거였다는 걸 번뜩 떠올렸다. 당장 앞날의 고민으로 깊은 내면을 가렸다. 이 글을 마친 뒤로, 꽃을 심을 수 있는 일을 찾아볼 거다. 또다시 같은 질문으로 돌아오겠지만, 그땐 다른 내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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