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 비가 한 차례 쏟아진 뒤, 오전 산책을 나가기 위해 두툼한 패딩을 집어 들었다. 기온이 떨어졌을까 싶어 조금은 과하게 따뜻하게 챙겨 입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자마자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공기가 의외로 포근했다. 비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한낮처럼 부드러운 온기가 남아 있었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은 회색빛이었고 멀리 있는 산은 온기 속에 가려진 듯 모습을 감추고, 가까이 서 있는 건물들만 선명히 보였다. 따뜻함이 시야를 흐린다는 사실을 그렇게 처음 실감했다. 공기가 따뜻하면 먼 것들이 흐릿해지고, 지금 눈앞에 있는 것만 또렷해진다는 것. 언뜻 단순한 기상 현상 같지만, 그 안에 어떤 은유 같은 게 숨어 있는 기분이었다.
산책을 마치고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책을 읽었다. 그렇게 몇 시간 실내에 머물다 다시 밖으로 나오자, 앞선 풍경은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후의 공기는 오전과 전혀 달랐다. 잠깐 꺼내 놓았던 손등에 바람이 닿는 순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아, 실내에 있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오 추위를 느낀 것이 아니라 바깥공기가 실제로 차가워진 것이었다.
하늘이 원래의 색을 되찾고 있었다. 단정한 회색빛과 옅은 파란빛이 섞인, 겨울 하늘 특유의 담백한 톤. 조금 전까지 모습을 감추던 산도 제자리에 돌아와 조용히 나에게 존재를 알려왔다. 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는데, 따뜻함이 그것을 가려놓았던 것이다.
따뜻한 공기는 나의 시선을 가리고, 차가운 공기는 나의 몸을 움츠리게 하면서도 동시에 시야를 탁 틔워주었다. 둘 다 완벽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어쩌면 오늘 산책의 가장 정확한 결론이었다.
생각해 보면 삶도 그렇다. 따뜻함 속에 있으면 먼 것들이 흐릿해지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일들만 보인다. 마음이 편안하면 멀리 있는 고민까지는 굳이 보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면, 몸은 움츠러들지만 눈은 오히려 멀리 향한다. 불편함이 깊어질수록 더 멀고 큰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 역시 부드러운 온기 속에서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차가운 바람 속에서 문득 깨닫곤 한다. 따뜻함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잠시뿐이고, 결국 추위가 찾아와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아침엔 가려졌던 산이 오후에는 당연한 듯 나타난 것처럼.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따라온다’는 말을 무심히 생각했는데 오늘 산책길을 걸으며 그 말이 조금은 이해된 듯했다. 따뜻함과 추위는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서로를 드러낸다. 하나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때, 다른 하나의 의미가 더욱 선명해진다. 우리가 겪는 일들도 그런 과정을 지나며 서로의 그림자를 만들어준다.
산책길을 걸으며 본 변화들은 그저 날씨의 변덕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를 비추는 조용한 풍경 같았다. 따뜻함이 시야를 가릴 때도 있고, 차가움이 앞을 열어 줄 때도 있다. 매일 같은 길을 걸어도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이유는, 결국 나 역시 하루의 온도에 따라 달라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 내가 걸은 길은 그렇게 작은 깨달음 하나를 남겼다.
따뜻함이 모든 것을 선명하게 만드는 건 아니다.
때로는 차가움이야말로, 내가 놓치고 있던 풍경을 다시 가져다준다.
내일의 산책은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그 생각만으로도 다시 걸을 이유가 충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