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안하다. 오뎅아...
내가 테니스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잠시 살면서이다. 길 가다 "Women's Tennis Club"에서 회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문을 보고 테니스장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간 것이 최초이다. 어떤 운동도 해본 적이 없고, 신체적 능력에 자신감 제로였던 내가 왜 테니스를 하려 했을까?
그날 따듯한 봄날, 캘리포니아의 훈풍이 적당히 부는 바깥에서, 적당한 크기의 테니스 코트와 적당하게 딱딱 오가는 볼 치는 소리, 무엇보다 코트 모서리에 떨어진 연두색의 공을 만졌을 때 느꼈던 보드랍고 따듯한 느낌.
그때부터였던것 같다.
무작정 테니스를 좋아하게 된것이..
이후 나의 테니스에 대한 분투기는 한 마디로 내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체격도 왜소하고 몸도 약했다. 왜소한 체격, 잔병치레가 많았던 어린시절, 청소년기에도 허약했고, 20대에는 영양실조에 걸리기도 했다. 그래서 몸 쓰는 건 확실히 포기했고, 근처도 가지않았다. 내 키가 자라지 못함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나’라는 개인에 대한 첫번째 확실한 자각이었다. 몸을 쓰지 않고 할 수 있는 쪽으로 빨리 진로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테니스를 하게되면서 변하고 싶어졌다.
미국의 유명한 에세이스트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끈이론 String Theory”이라는 에세이를 쓴 적이 있다. 테니스에 대한 예찬을 담은 무미건조한 이글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테니스에 대해 토네이도 앨리, 즉 토네이도가 일어나는 계곡에서 파생된 스포츠라며 '테니스라는 운동은 바람과 날씨의 어떤 부당한 처우로부터도 기묘한 로봇 같은 초연함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한적 있다.
테니스라는 운동은
바람과 날씨의 어떤 부당한 처우로부터도
기묘한 로봇같은 초연함을 유지하는 것
테니스는 실외에서 자연에 맨몸으로 노출되어 바람을 가르며 경기를 하기 때문에 선수가 홀로 온전히 자연의 심술을 맞닦드려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테니스가 탁구나 배드민턴 같은 가벼운 공을 쓰는 경기보다 더 재미있는 것 같다. 야외 코트에서 테니스를 하는 선수를 보면 단단한 근육 사이로 스파이크할때 흔들리는 미세한 힘줄. 서브할때 이마 위로 오른판을 쭉 펴 활처럼 아래로 강한 반동을 내려 공을 내리치는 순간 ... 아 그 순간은 절로 입이 벌어지고 내가 경기하는 것처럼 가슴이 떨린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테니스를 하려면 어쨌거나 온몸을 사용하여 공을 치고 움직이기를 반복해야한다. 바람을 거스르고 뛰어야한다. 다행인 것은 축구처럼 멈춤없이 45분을 뛰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쉴 수도 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게임이 끝나기까지는 한두시간 이상으로 오래 걸리긴 하지만 매순간 이기고 지며, 자세를 정비할 시간이 있다. 마치 인생 같다. 인생은 길지만, 매순간 순간의 스냅샷이 쌓여서 그러하다.
흔히 테니스를 높이의 운동 Game of Heights. 이라고 한다. 여러 테크닉과 경륜도 중요하지만, 키가 클수록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축구 같이 경기장이 넓고 오래 뛰는 경기면 키나 신체조건은 중요하지 않다. 또한 탁구 같이 작은 탁구대 위에서 하면 역시 키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테니스는 적당한 크기의 코트에서 위에서 내리꽂는 서브로 시작한다는 게임규칙상 키 큰 사람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마치 수영과 단거리 육상에서 키 크고 다리가 긴 사람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과 마찬가지다. 키 큰 사람이 야외 테니스코트에서 날씨와 바람을 거스르고 힘들여 강하게 스파이크 하면 이길수밖에 없다. 그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작으며 힘도 없다.
Game of Heights. 테니스는 높이의 운동 ...
어릴 때 큰 공에 맞았던 기억이 오래오래 트라우마로 남아있어 나는 큰 공을 두려워한다. 대학생 때 생활체육과목에서 배구 토스를 하는 숫자만큼 점수를 매기는 거였는데 1년 동안 해서 1점 받았다. 배구공 한번 위로 올리고 나서는 공이 나에게로 떨어지는걸 무서워해 도망갔던 기억이 난다. 테니스 공은 축구공이나 배구공처럼 크고 무겁지 않아 일단 무섭지 않다. 탁구공이나 골프공처럼 너무 작지도 않게 딱 손에 잡힐 정도로만 작다. 너무 작은 공은 잘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찾으러 다니다 지쳐 자빠진다. 탁구는 작으면서 너무 가벼워 실외에선 경기를 못한다. 오직 실내에서만 해야 하는 한계가 있다. 이에 비하면 테니스공은 적당한 크기에 무게가 있어서 야외에서 할 수 있다. 왠만한 선수가 치는게 아니면 상대의 공에 맞아도 기절할 일은 거의 없다.
심지어 테니스공은 털까지 보송보송 나있어서 촉감이 부드럽다. 언제 만져도 따뜻하고 꼭 사람 손을 잡는것 같다.
지고 있을때, 경기가 잘 안풀릴때, 에러를 연발할 때도 테니스공을 잡으면 누군가 손을 잡고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것 같다.
언제나 부드럽게 위로해줄 것만 같다.
색깔도 잔디같이 부드러운 연두색이다.
어떤 운동경기의 공도 이렇게 자연친화적이지는 않다.
테니스는 전신운동이면서 매우 격렬한 운동이다. 건강검진 때 문진 테스트 맨 첫머리에 항상 “일주일에 숨이 헐떡거릴 정도의 운동을 얼마나 하십니까?”라는 질문이 나온다. 테니스는 30분 레슨만 받거나 랠리, 연습만 해도 땀이 나며, 2시간 정도 게임을 뛰고나면 정말 땀이 흥건해진다.
테니스는 내가 끝까지 팔을 뻗어 라켓을 휘두르면서 시작된다. 온 몸을 활짝 펼치고 스트레칭하고 공을 타격하고, 코트의 안팎을 자우자재로 뛰고, 기다리고 정지하는 모든 신체활동을 요한다. 제한된 코트 안에서는 어떤 활동도 가능하며 하지말아야 할 제한이 전혀 없다. 펜싱처럼 좁은 길에 나를 한정할 것도 아니고, 태권도처럼 나의 품새 하나하나에 제약조건이 많지도 않다. 무거운 장구로 내몸을 감싸지도 않는다. 오직 내 코트 주변에서 온몸을 써서 상대방의 공을 밀어 보내면 된다.
테니스 코트는 적당히 넓고 적당히 좁다. 직접 게임하는 당사자로서는 적당히 통제가능한 규모의 경기장이다. 동시에 보는 관중으로서는 한눈에 두 선수의 움직임과 볼의 이동, 경기의 진행을 볼 수 있다. 카메라로 촬영하는 입장에서도 한 앵글에 경기를 다 담을 수 있다. 심지어 나는 코트 안에서만 움직여야 한다는 제약조건도 없다. 공만 제약조건이 있을 뿐이다.
몬드리안의 추상 그림 처럼 테니스 코트는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규모의 코트에 선을 그려 놓는다. 그 위에서 라켓 하나를 들고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인간을 보면서 위안을 얻는다. 나의 경기장도, 너의 경기장도 다른 사람들이 보며 참견하고 비평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 정해진 선이 있어서 너무 튀어 나가지도 못한다. 그래도 그 선 안에서만큼은 마음껏 몸을 놀려 온힘을 다해 공을 내려쳐본다. 흙코트든, 잔디코트든, 하드코트든 어느 코트엘 가건 선과 공간의 긴장된 균형을 보면 뭐라 설명하기 힘든 평온을 느끼게 된다.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운동, 규칙에 따라 경기하고 패배에 고개숙이고, 승리에 기뻐하게 된다. 혼자 하는 달리기, 마라톤, 등산 같은 것은 사실 언제든 시작할 수 있고, 끝낼 수 있다. 딱히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 자기가 결심해서 열심히 하면 향상될 수 있다. 나도 그래서 등산과 트레킹을 좋아했던 것 같다. 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고, 언제든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운동이나 취미는 딱히 못할 수도 없다. 점수를 따는 것도 아니고 상대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정해진 코트, 그리 복잡하지 않은 규칙, 반복되는 승패를 통해 성공과 실패의 잔근육을 쌓을 수 있다. 평소 잔근육이 쌓이면 정말 큰일이 닥쳤을때 무리없이 헤쳐나갈 수 있다.
반면 테니스 같이 상대가 있어야 하는 운동은 일단 짝이 있어야 하니 경기를 내맘대로 하기가 어렵다. 내가 하고싶어도 상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상대가 있는 경기를 해봐야 이기고 지기를 반복하면서 성공과 실패를 경험할 수 있다. 규칙을 익혀야 하고, 규칙 안에서 경기를 진행하는 경험을 쌓을 수 있다.
테니스는 시작하기 어려운 반면 상대적으로 게임의 규칙이 매우 단순하다. 처음에는 0-15-30-40-게임. 규칙의 숫자와 6게임을 따야 1세트라는 규칙까지 잦은 단발 게임이 연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다소 괴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비하면 실제로 경기를 하는 도중, 공이 라인을 밟으면 인, 나가면 아웃. 처음 서브할땐 어떻게 .. 정도의 규칙이 있을 뿐이다. 코트 안에만 들어서면 나는 잘 치고 잘 받으면 그만이다. 몸을 써서 직접 부딪치며 경기해야 하는 유도, 레슬링, 권투는 말할 것도 없고, 축구 같은 단체경기의 복잡한 규칙, 신체 접촉시 뭐는 되고 뭐는 안된다는 규칙도 없다. 서로 몸을 부딪힐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오히려 머리부터 발 끝까지 하얀색 옷만 입어야 한다는
윔블던 경기의 복장규정이 훨씬 복잡하다.
앞으로도 나는 테니스를 하면서 매일 숱한 좌절과 패배와 창피함을 느끼겠지만 계속 갈 것이다. 저 아줌마 왜 또 나왔지? 해도 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가볼 것이다. 타고난 신체조건상 난 잘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테니스라는 운동을 알게 되면서는 포기하고 싶지 않다. 나의 몸에 대한 콤플렉스와 허약했던 유면시절의 유리잔 같은 기억을 단단하게 채우고 싶다. 약한 과거를 지우기보다, 앞으로 남은 중년과 노년을 더 건강하게 만들고 싶다. 난 항상 묵묵하게 성실하게 노력하니까... 이것도 계속 가보자.
요즘은 테니스할 때, 테니스하러 갈때, 테니스 경기 볼 때, 테닛 공치는 소리 들을 때, 테니스하러 갈 곳을 찾을때, 프랑스 오픈의 붉은 롤랑가로스 코트를 볼 때 참 행복함을 느낀다. 아무 설명 없이, 아무것도 얻는것 없이 온몸과 마음으로 이렇게 행복감을 느끼는건 많지않다.
미안하다 오뎅아....
사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 세가지를 굳이 꼽으라면 1.눈 snow 2.오뎅 3. 아이들과 가족 이었다. 이제 중년이 되어서 주책 같이 순서를 바꾸려한다. 1.눈 2.테니스 3. 아이들과 가족. 아이들보다도 남편보다도 먼저, 2번 자리에 있었던 오뎅을 밀어내고 테니스볼을 넣으려 한다. 미안하다 오뎅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