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정 규모, 일정 거리의 트레킹이 필요하다
2주간, 대한민국 대표 50대의 저질체력 부부가 남미 파타고니아 트레킹을 다녀오고보니 이토록 힘들고도 아름다운 트레킹은 결국 규모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도 생각만 바꾸면 충분히 이런 트레킹 로드, 즉 트레일이 나올 수 있다. 의외로 한국에는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등 높은 산이 있고, 주위에 산악지대, 구릉과 평야, 마을이 적당히 자리잡고 있는 곳이 많다.
처음 트레킹으로 파타고니아를 올 정도로 우리 부부는 겁없고 무식했다. 그런 처지에서 한국의 등산문화와 트레킹에 대해 말하기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저 걷기를 좋아하고 장거리 트레킹을 조금 해본 경험으로 몇마디만 해보고자 한다.
한국에서 트레킹, 보통 등산이라고 하면 당일치기, 혹은 몇시간 동안 정상까지 직선거리로 가는것을 의미한다. 반면 세계 유수의 트레킹길이나 등산은 직선거리로 오르지 않는다. 그런건 에베레스트 같이 높이를 정복할 때나 필요한 루트다. 보통 트래킹이라 하면 오래 동안 천천히 즐기기 위해 가는 것이므로 산 하나를 가더라도 옆으로 천천히 둘러간다. 따라서 높은 산이 아니더라도 오래 걷기가 가능하고 몇개의 산과 들판을 옆으로 엮으면 트레일이 되는 것이다.
경제학에서 경제행위의 순환과 편익이 나려면 일정 규모 이상이 필요하다는 규모의 경제 논리가 있다. 작은 트럭으로 붕어빵 가게를 해본다고 생각해보자. 아무리 적게 만들어 팔려고 해도 기본적으로 트럭, 붕어빵 기계, 밀가루와 반죽 재료들, 포장 종이봉투, 야간 램프와 의자가 필요할 것이다. 이런 모든 자본기자재와 재료를 준비해야만 붕어빵 하나를 구을 수 있다. 일단 기자재가 준비되면 그 다음에 하나씩 추가로 만드는 비용은 크게 증가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단 기본적으로 처음 뭔가를 시작하려고 해도 기본 투자는 일정 수준 이상이 필요하다. 같은 원리로 어느 정도 투자를 한다면 기왕이면 대도시에서 크게 시작하는게 좋은게 소비자도 많고 유동인구도 많고 상권이 형성되어있어야 유리하다.
마찬가지로 걷기여행을 할 때에도 일정 거리와 규모, 일정 시간이 꼭 필요하다. 트래킹 코스로 일정 규모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걷는 나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걸을 수 있어야 보람있다. 나는 이것을 "규모의 트레킹"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파타고니아 걷기를 하며 느낀 점도 바로 규모의 트레킹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파타고니아는 규모의 트레킹이 가능한 최적의 환경이다.
트레킹은 최소 1-2일 이상 걸을수 있어야 한다.
칠레 토레스 델파이네 공원에 오면 최소 4일, 많게는 10일 이상을 걸을 수 밖에 없다. 위로는 빙하와 암벽이 가로막고있기 때문에 정상을 빨리 오르는 등산은 불가능하고, 옆 둘레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트레킹만 가능하다. 어딘가를 안보고 스킵할 수는 있어도 지름길은 없다.
아르헨티나의 피츠로이봉도 갔다오려면 또 최소 2-3일이 필요하다. 상당한 시간을 걸어야 하되 중간중간 쉬어갈수 있는 마을이나 산장 같은 도피처도 필요하다. 이론상 텐트를 가지고가면 하루이틀 단축하고 완주할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 와보면 며칠만에 완주했다거나 어디를 찍고왔다는 식의 소위 도장깨기 트레킹은 크게 의미가 없다. 매일 가는 코스가 다 다르고 쉽지 않다. 코스가 다 다르고 그날의 날씨도 매일 다르고 각자의 컨디션이 매일 다를것이기 때문에 매일 전속력으로 갈수는 없다. 쉬었다 가는것이 하등 이상하지 않다.
지상에서부터 가장 높은 산은 있을 수 있어도 특별히 어느 산이 더 우월하지는 않다. 어차피 하늘 아래에서 보면 만년을 하루같이 눈이 내리고 빙하로 굳어버린 산은 다 똑같다. 빨리 완주할수도 없고 하루만에 스킵할수도 없어 최소 며칠 이상 걸어야만 하는 일정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트레일, 트레킹 코스들은 무엇 때문에 유명하며, 사람들은 왜 가는 걸까?
로키산맥 이나 요세미티 국립공원 등 미국과 캐나다의 산악지대에는 존 뮤어 트레일이 유명하다. 보통 일주일 이상 걸려 몇주까지도 다닌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도 보통 30일 이상 걸어온다. 프랑스와 스위스에 걸쳐있는 몽블랑 산 주변을 걷는 투르 드 몽블랑 트레일도 짧게는 일주일이 필요하다. 이탈리아 북부의 돌로미테 트레킹도 1주일은 잡아야한다. 스웨덴의 쿵스레덴 트래킹은 1년중 3개월만 개방하며 전체 구간이 440km에 달한다. 뉴질랜드의 밀로드 트레킹도 보통 10일은 잡는다. 남미 페루 마추픽추까지 가는 긴 여정인 잉카 트레일도 교통수단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1주일에서 한달까지 가능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트레킹은 유명한 산이나 산맥을 끼고는 있지만 산정상을 오르는게 목표가 아니다.
바삐 살던 일상을 벗어나 의도적으로 자연 속에 나를 가두기 위해 택하는 것이 트레킹이다. 사람도 몸속에서 독소를 해독하려면 최소 며칠이 걸리고, 피부도 재생하려면 2주 이상 걸리듯이 야생 트레킹도 최소 3~4일 이상이 필요하다. 1주일 이상에서 길게는 한달까지 소요되는 트레일이 나와야한다.
또한 트레킹이 오지에 산악지대일 경우가 많아 준비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챙겨야할 준비물들이 많다. 텐트를 가져가야할 경우도 생긴다. 하루 당일치기 가려고 이렇게 번거로운 준비를 할 수는 없다. 기왕 준비하는거 한 1주일 정도는 충분히 걷고 지치고 혹은 즐긴 다음에야 비로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땀에 흠뻑 젖고 너무 지쳐서 집 생각이 가득할 때, 그때쯤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나를 찾아가는 충분한 시간, 자연과 교감하며 나를 잊는 충분한 시간. 이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몇시간만에 산정상을 냅다 오르는 등산 말고 규모의 트레킹이 필요하다. 만들고싶다. 물론 이 트레일을 개발하려면 제주 올레길을 개발한 서명숙 같은 분이나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트레킹 Trecking - 보통 산악지대 구릉을 높낮이로 낮게 걷는 등산
트래킹 tracking - 신호나 흔적을 좇아가는것, 신호 트래킹
하이킹 Hiking - 보통은 올레길 같이 낮은 도심길을 걷는것이지만, 산길을 걷는 의미도 된다.
암벽등반 Climbing - 우리가 보통 등산이라고 변역하는데 영어권에서는 암벽등반 연상
한국의 등산 - 에 해당하는 영어명은 없음. 처음부터 산의 정상을 향해 거의 직선, 혹은 지름길 거리로 오르는 등반형태로 굳이 외형상 유사한 단어를 고르자면 Climbing 암벽등반에 가깝다. 하긴, 북한산, 도봉산의 어느 곳을 가더라도 외줄 로프를 잡고 힘겹게 올라야하는 장면을 보게된다. 심지어 그런곳은 꼭 안내문에 “평이한 코스”라고 써져있다.
도심 배회하기 Wander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