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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May 12. 2022

직선과 색의 소개팅

수평선과 수직선은 검정과 하양이라고 앞서 말했어요. 칸딘스키는 무채색인 검정과 하양이 침묵인 것처럼 두 직선의 울림도 최소치로 감소되어 침묵 또는 아주 작은 속삭임이라고 풀이합니다. 이처럼 동일하지 않더라도 내적 평행을 찾아서 서로의 유사성을 연관 짓는 것은 그의 화법이에요. 때로는 비유로, 때로는 상징으로 풀어내는 그의 진심은 언제나 내적인 울림에 핵심이 있고, 내적 필연성이 종착역입니다. 어려운 용어처럼 보이지만 감동을 칸딘스키 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칸딘스키는 감동이나 감정과 같은 느낌이 그냥 지나가는 분위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유가, 실체가 있다고 주장해요. 그래서 그는 내면의 울림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는 무모해 보일 수도 있어요. 너와 나의 감정은 다르고 게다가 지극히 주관적인 영역이니까요. 


그러나 이것은 심리학과 비슷한 문제입니다.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심리상담 역시 개인사를 객관화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객관화를 통하여 얻는 것은 평정심이지요.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보는가, 무엇이 중심인가, 어디에 묶여 있는가 등등 관점에 대한 성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평선과 수직선은 어찌하여 검정, 하양과 평행을 이루게 된 걸까요? 칸딘스키는 두 직선의 위치가 여러 선들 가운데 특별하다고 봅니다. 이들은 중심의 위치에서 반복이 불가능한, 단 한 번만 허락되는 선으로 홀로 떨어져 외롭다는 것이지요. 칸딘스키는 여기에 색상환을 대입시켜요.


색상환은 색의 변화를 둥근 원형으로 배열하여 색의 속성과 순환을 보여주는데 검정과 하양은 제외되지요.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하양과 검정은 색상환과 별개로 떨어져 있어요. 칸딘스키는 이렇게 동떨어져 있는 상태가 두 직선과 색채의 접점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먼셀의 색상환


검정과 하양은 이미 널리 알려진 보편적인 정의가 있어요. 검정은 죽음, 하양은 순수, 탄생 등으로 알게 모르게 우리들 마음에 있으니까요. 칸딘스키는 여기에 자신만의 세밀한 관찰과 소감을 덧붙여 놓습니다.


그는 하양을 모든 색깔이 날아가 버린 세계의 상징으로 봤어요. 이 세계는 완전히 현실과 동떨어진 곳으로 어떤 음향도 전달될 수 없는, 또 들을 수 없는 침묵의 세계라는 것이죠. 이곳의 침묵은 그냥 소리만 없는 침묵이 아니라 절대적인 차원의 침묵을 말합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뛰어넘을 수 없는 침묵인 거죠. 그런데 칸딘스키는 이때의 침묵을 음악에서의 휴지나 무음에 비교하며 악장의 종결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하양은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는 침묵이니까요. 하양과 평행을 이루는 수직선에 대하여 칸딘스키는 서있기, 올라가기, 성장, 능동적인 움직임 등을 나열합니다. 보통 흰색을 탄생으로 보는데 이것도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검정은 어떨까요? 이와 반대 상황일까요? 맞습니다. 칸딘스키는 검정을 가능성이 없는, 지는 해를 좇는, 미래가 없는 영원한 침묵의 내적인 울림으로 여깁니다. 음악적으로 표현하면 완전히 종결되는 휴지, 완성을 의미하는 휴지입니다. 이 휴지가 끝나면 악장의 연속이 아니라 새로운 악장, 즉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죠. 그래서 검정의 침묵은 희망이 없는 영원한 침묵입니다. 이러한 검정이 수평선과 맞닿게 되는 이유를 칸딘스키는 수평선의 편평함, 누워 있기, 실려 있기, 수동성에서 찾는 것이고요.  


이와 더불어 칸딘스키는 검정이 외적으로 가장 음향이 없는 색이라고 해요. 그래서 검정에게 다가서는 색은 아무리 약해도 더 강하게,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지요. 반면 하양은 모든 색깔을 약하게 만들어요. 많은 색깔이 하양에 다가서면 분해되고 무력화되므로 퇴색되어 보입니다. 


지금까지 직선의 기본 유형 중에서 두 가지를 살펴보았어요. 이제 남은 것은 대각선입니다. 칸딘스키는 대각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봅니다. 자유로운 직선과의 가장 큰 차이로 대각선은 면 위에 완전히 고착된다는 것, 그리고 수직선과 수평선의 차이로는 이들보다 더 큰 내적 긴장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대각선은 빨강과 평행을 이루게 됩니다. 


칸딘스키는 빨강을 생기에 차 있고 활동적이며 동요하는 색으로 작용하지만, 사방으로 자기 힘을 소모하는 노랑처럼 경솔한 성질은 아예 지니지 않는다고 정의합니다. 빨강의 에너지는 넘쳐나지만 거의 외부로 향하지 않고 주로 자신의 내부에서 작열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로 인하여 빨강과 대각선의 교집합이 성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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