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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선 May 16. 2024

K - 장춘기

가난이라는 기억.

난 이때부터 집은 단칸방은 가난이다.이라는 문장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다. 내가 자라면서 방이 두개에 거실이 있는 주택으로 이사를 했지만, 그 문장은 내 나이 40이 되어서도 따라다닌다.  단칸방은 말 그대로 방 1칸, 부엌이 있었다. 아빠, 엄마, 나, 여동생 넷이서 나란히 누우면 꽉 차는 방이었다. 방은 미닫이 문이었는데 미닫이 문을 열면 바로 부엌이었다. 부엌에서 문하나를 열면 바로 밖 계단이었다. 


부엌은 직사각형태이고 키가 작은 편인 엄마가 서면 천장이 조금 남는 정도였다. 음식을 간단히 해먹을 수 있는 가스레인와 그 옆에 얼굴을 씻을 수 있는 수도꼭지와 아래 하수구가 전부 였다. 그곳은 부엌이자 욕실이었다.엄마가 음식 하는 곳 옆에 유일한 하수구와 수도꼭지는 지금 내 다리로 가로 세로 크게 한걸음씩 정도 밖에 안 되는 정사각형 자리였다. 그곳은 샤워실도 되고, 부엌도 되었다가, 현관도 됐다. 우리 가족은 부산 사투리로 일명 대야에 물을 받아 세수를 했었다. 우리가 씻고 있으면 엄마는 같은 공간 그 옆에서 밥을 지었다. 매일 샤워를 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거기서 4 식구가 살기에 아주 비현실적인 집이었다. 씻고 있는데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면 현관문을 열어 줄 수 없었으니 말 다했다. 추운 겨울날 수도가 어는 날이면 가스레인지에 물을 끓여서 씻어야 했다. 주택은 수도가 어는 날이 많았다. 부엌겸 욕실은 타일 바닥이었는데 추운 겨울엔 바닥에 발을 딛고 부엌에 나가는 게 싫었다.  지금 사는 집 화장실 바닥에는 난방이 들어온다. 발바닥에 따뜻한 온기가 전해질 때 가끔 그 시절 화장실이 생각이 난다. 바닥은 따뜻하지만 그 시절 그 기억 때문인지 발끝에 전해지는 느낌이 머리끝까지 시려 오는 느낌이 든다.


단칸방에 화장실은 사치였다. 그럼 화장실은 어떻게 갔느냐고요? 화장실은 집에서 몇 계단 내려가야지 있었다. 외부 화장실로 그 주택 단칸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공용 화장실이었다. 바쁜 아침 시간이면 화장실 앞에 줄을 섰다. 난 화장실이 가기 싫어서 참은 적 이 많았다. 아침시간엔 화장실을 서둘러 가야 했고, 엄마는 화장실을 미리 다녀오라고 아침부터 성화셨다. 굼뱅이처럼 꾸물대는 날이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바쁜 아침시간에 공용 화장실을 전세내고 있으면 밖에서 난리가 났다.  당연히 볼일을 편안하게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TV에 나올법한 이야기들이 나는 진즉에 경험한 것이었다. 집에서 7개의 계단을 내려가야지 화장실을 갈 수 있었다. 우리 집 아래가 바로 화장실 이었다. 각각의 집에서 번갈아 가면서 청소를 했다. 어릴 때는 저녁에는 무서워서 화장실에 못갔다. 그래서 방안에 요강이 있었다. 이건 정말 숨기고 싶은 이야기 이긴 하지만 그 시절 그 기억을 솔직히 적고 싶다. . 밖에 있는 공동 화장실이 아니라, 집안에 가족만 사용 하는 화장실을 사용 한다는 것은 그렇게 따뜻하고 좋은 일인지 나는 그때 몰랐다. 어쩌면 몰라서 더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모든 일들이 당연한 거였기 때문이다. 몰랐기 때문에 불편함이나 다른 불만 없이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좋게 생각하면 그나마 좋은 집에 살았던 기간이 짧아서였을까? 


단칸 월세방도 금방 적응을 했었다. 중요한 건 단칸 월세방에 익숙해진 우리 가족은 환경에 만족했다는 점이었다. 무엇이 잘못된 건지도 모른 채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경을 시작하고 첫째로서 자라면서 내마음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그날이면 엄마가 휴지 쓰는 게 아깝다고 신문지를 잘라서 줬었다. 월경을 초등학교 5학년 겨울 방학에 시작 했던 나는 더 어른스러웠다. 춥고 재래식 화장실에서 패드를 갈 때의 기억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사실 어릴 때는 뭣도 모르고 이상하지 않았던 사소한 일들에 게속 부딪히고 점점 막연한 부끄러움이 되었다. 아니라 내집이 처한 상황과 환경이 너무 싫었다. 여기 살고 있는 내 자신이 단칸방이 된 것 같아서 더 싫었다.  단칸 월세방도 싫었지만 화장실이 가장 싫었다. 


 난 많은 시간이 흐를수록 '난 가난한 아이구나' 나 빼고 모두 잘 사는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잘 살고 못 살고의 조건은 집이 되었다. 나에게 집은 그런 상징적인 의미가 되었다. 다른 친구들과 나를 스스로 비교했었다. 비교는 점점 더 우울해지고,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이사 갔던 그날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내 어릴 적 가장 불행한 기억이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의 기억은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 철이 없었던 건지 아니면 철이 빨리 들었던 건지 잘 모르겠다.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난 어릴 때 많은 불안을 느꼈었다. 난 그 불안을 고스란히 가지고 성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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