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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경 Oct 18. 2023

수능 보던 날

수능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수능을 본 지 20년이 흘렀지만, 그날이 아직도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날씨보다 더했던 마음의 쓸쓸함 때문일 것이다.  

   

수능 전날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예민한 성격으로 평소 작은 소리에도 긴장하며 눈을 번뜩 뜨던 나는, 특별한 날을 앞두고 마음이 와르르 무너진 상태였다. 재수는 있을 수도 없는 일. 무조건 대학에 가야 했다. 일찌감치 특수교육과에 가기로 마음먹었으나 그 당시 특수교육과가 있던 대학은 많지 않았다.


나는 공주대학교에 가고 싶었다. 이유는 하나. 집을 떠나 자취를 할 수 있는 거리의 학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취는 절대 안 된다는 엄마의 말에 일언반구 못하고 마음을 접었다. 통학이 가능한 거리의 학교는 서울권의 단국대, 이화여대. 경기권의 강남대였다. 서울권에 갈 성적은 안 됐다. 강남대는 어느 정도 해볼 만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전날 엄마가 안쳐놓은 압력밥솥의 가스 불을 켠 후 씻고 나왔다. 압력밥솥의 요란한 소리에 엄마가 깨서 나오셨다. 피곤이 들러붙어 있는 엄마의 얼굴을 보자 긴장되던 마음이 조용히 수그러들었다. 엄마는 냉장고 문을 열고 원래 있던 반찬을 꺼내 아침을 차려 주셨다. 밥은 늘 스스로 차려 먹었기에 차려 주는 밥상이 어색했다. 네모난 작은 찻상에 갓 지은 찰밥, 계란말이, 콩자반, 오징어젓갈이 놓여 있었다. 소화 잘되라고 찹쌀만 넣어 밥을 지은 건데 자꾸만 목에 걸렸다. 보온 도시락통에 반찬을 담으며 졸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목을 메이게 했다.


아버지의 뇌출혈 수술 후 엄마는 혼자 모든 일을 감당하고 계셨다. 여섯 식구를 먹여 살리느라 잠도 쉼도 부족한 상태였다. 엄마의 고된 날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나는 밥을 꼭꼭 씹어 눈물과 함께 삼켰다.     


엄마는 도시락을 싸주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가방을 메고 소파에 앉아 친구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잠에서 깬 아버지가 방에서 엉거주춤 걸어 나왔다. 어둑한 거실에 혼자 앉아 있는 나를 멀뚱히 바라보더니 어눌한 말투로 물었다. 화, 장, 실, 어디…. 23평의 작은 아파트 안에서 화장실을 찾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니 한숨이 흘러나왔다. 친구의 연락을 받고 집을 나서는데 화장실에서 나온 아버지가 물었다. 어, 디, 가. 대꾸하지 않고 집을 나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눈을 감았다. 울지 말자. 오늘은 중요한 날이잖아. 마인드컨트롤.      


1층으로 내려가자, 검은색 고급 승용차가 비상 깜빡이를 껌벅이고 있었다. 친구는 차창을 열어 나를 불렀다. 운전석에는 친구의 아버지, 보조석에는 어머니가 타고 계셨다. 나는 뒷좌석에 친구와 함께 앉았다. 친구 어머니는 내게 물으셨다. “아버지는 괜찮으시니?” 친구는 엄마를 타박했다. “엄마, 그런 거 묻지 마. 시험 날 신경 쓰이게 왜 물어보는 거야.” 나는 웃으며 괜찮다고 데려다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친구는 이게 뭘 감사할 일이냐며 시험이나 잘 보자고 내 마음을 살폈다.     

 

차 안은 온기로 가득했다. 친구가 속한 가정은 참으로 따뜻한 곳이었다. 친구네 가족 틈에 어설프게 껴 있던 나는 조금 서글펐다. 내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들, 노력한다고 나아지지 않는 것들이 마음을 힘들게 했다. 푸르스름했던 아침이 점차 밝아 오는데, 내 마음은 아직도 어둠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시험을 마치고 친구와 함께 교문으로 걸어갔다. 친구의 가족이 마중 나와 있었다. 우리보다 키가 컸던 친구의 동생은 수고했다며 언니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친구는 엄마 품에 안겨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나는 그 옆에 멀뚱히 서서 미소 짓고 있었다. 자꾸만 눈물이 삐져나오려 해서 가만가만 나를 다독였다. 안 돼. 여기서 울면 안 되는 거야. 웃어. 웃어야 해.    

  

집에 돌아갈 때도 친구네 차를 얻어 탔다. 친구 부모님께서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하셨지만 웃으며 정중히 사양했다. 집에 돌아와 여느 때와 같은 저녁을 먹었다. 가채점하고 평소보다 잘 나온 성적에 놀라워하며 잠을 잤다.     


수능 다음 날, 학교에 갔는데 반 분위기가 밝았다. 나만 성적이 오른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대다수의 수능점수가 모의고사 대비 평균 30점 이상 잘 나온 상태였다. 물수능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좋아할 일이 아니라고 하셨다.      


원서를 쓰기 위한 상담이 시작되고. 얼마 전 아버지가 쓰러지며 우리 집 사정을 알게 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안전하게 지방대 특차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나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했던 강남대는 써 보지도 못하고 정시 친구들보다 앞서 특차합격생이 되었다.      

 

통학이 가능했던 충남권 대학에 다니며 자주 수업을 빼먹고 학교생활을 허투루 했다. 특수교육과가 아닌, 학교만 보고 원서를 썼더라면. 아버지가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수도권 대학에 갈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지질함과 오만함이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 해도 나는 본래의 선택을 할 것이다. 그곳에서 함께 수업을 빼먹고, 울고 아파하며, 우리 잘못이 아닌 일로 어찌할 줄 몰라 방황하던, 나와 닮은 친구들을 만났으니까.      


이번 주 토요일에 그 친구들을 만난다. 아이들을 두고 처음으로 우리끼리만.

우린 또 얼마나 웃고 울게 될까.

얼마나 보드랍게 서로를 안아주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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