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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경 Oct 14. 2023

들어주지 않는 기도

폭력의 그늘에서

어렸을 때부터 다니던 성당은 우리 집 바로 옆이었다. 우리 집은 수녀원 담벼락과 맞닿아 있었는데, 성당에서 잔치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수녀님이 담 아래로 떡이며 과일을 건네주셨다. 성당에 다니지 않았던 엄마는 수녀님께 받은 것들이 고마워서, 드릴 게 없어 미안해서 세례를 받았다.     


수녀님은 엄마를 ‘자매님’이라고 불렀다. 자매님, 자매님. 엄마를 부르는 수녀님의 목소리가 들리면 엄마는 하던 일을 멈추고 담 아래로 달려갔다. 잠시나마 엄마의 얼굴이 환해지는 순간이었다. 수녀님의 부름을 듣고도 엄마가 나가지 못하는 날들이 있었는데, 전날 아버지에게 맞은 상처가 얼굴 곳곳에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날은 엄마 대신 내가 쭈뼛거리며 담 밑으로 나갔다. 수녀님은 한밤중에 우리 집에서 일어난 일을 다 알고 계셨다.   

   

 “엄마 괜찮으시니?”

 ‘아니요. 괜찮지 않아요. 우리를 도와주세요.’      


입을 굳게 다물고 눈으로 말했다. 아버지는 체구가 작지만 술만 마시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성인 남자 여럿이 말려도 다 뿌리치며 엄마를 향해 돌진하던 사람이었다. 수녀님도 그런 아버지가 무서워서 돕지 못하는 거라고 어린 마음은 생각했다.      


10평 남짓한 지붕 아래에서 반복되는 폭력이 일어났지만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피해자였던 엄마조차 도움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와 달랐다. 도움이 절실했다. 성당에 열심히 다니며 기도했다. 살려달라는 애원이나 다름없었다.    

  

“하느님, 저에게 왜 이런 아버지를 주셨나요.

저는 아버지가 필요 없어요. 데려가 주세요.”     


고3, 수능을 백일 앞둔 때에 드디어 신이 내 기도를 들어주는 듯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있을 때 담임선생님이 나를 복도로 불러냈다. 집에서 연락이 왔다고, 아버지가 쓰러지셨으니 빨리 가보라고 하셨다. 가방을 챙겨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며 핸드폰 전원을 켰다. 집에 일이 생겼으니 빨리 오라는 문자가 와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어린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외숙모가 와 계셨다.   

   

아버지는 그날 오전부터 채기가 있어 불편해했다고 한다. 한의원에 가 진료를 보았고 특별한 소견이 없어서 약만 지어 먹었다. 어지럽고 메스꺼운 현상이 지속되자 엄마는 바늘로 아버지의 손을 땄다. 차도가 없이 점점 상태가 심각해지자 동네에서 가장 큰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다 했고 아버지는 구토와 함께 의식을 잃어 갔다. 결국 구급차를 타고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의식이 없었다고 한다.     


외숙모께 대강의 내용을 전해 들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동생들을 챙기고 여느 때와 같은 하루를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의 엄마 목소리는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뇌혈관 두 곳이 터진 아버지는 장시간에 걸쳐 수술을 하고 있었다. 엄마는 병원 성당에 가서 애들 아빠를 살려달라고 밤새워 기도하셨다고 한다.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삼켰다. ‘엄마, 저는 아빠가 필요 없어요.’    

  

고3이었지만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해서 하루는 등교하지 못했다. 한낮의 중간쯤 엄마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엄마는 울고 있었다. 아버지의 수술을 끝낸 의사가 말했단다. 사망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존하더라도 식물인간이 될 수 있다고.


난 울지 않았다. 옅은 희망을 품었다.

내 인생이 조금은 나아질 수도 있겠다는 희망.

더는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있다는 기대를 했다. 그런 마음이 소름끼치게 무서웠지만 나도 살고 싶었다.

불안에 떨지 않고 편안히 자보고 싶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그만 하고 싶었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보란 듯이 깨어났다. 아버지의 의식이 돌아온 날 조퇴를 하고 병원에 갔다. 중환자실에 있던 아버지는 머리에 여러 개의 의료용 전선을 매달고 있었다. 엄마는 아버지를 불렀다.     


 “수경 아빠, 눈 떠 봐. 수경이 왔어.”     


아버지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곤 나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 내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괜찮아, 네 아빠 괜찮데. 아까 엄마를 알아보더라. 얼마나 다행이니.”      


엄마는 내 눈물을 오해했다. 엄마가 흘린 눈물과 같은 종류의 것이라 여긴 것이다. 나는 참을 수 없는 마음을 붙들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세면대 물을 틀어 놓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울었다. 눈물이 잦아들 때까지 멈추지 않고 세수를 했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봤을 때, 거울 속 낯선 여자아이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아버지의 눈빛을 닮아 있었다. 시뻘게진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고, 꽉 쥔 주먹은 악에 받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누구에게라도 어디에라도 원망을 쏟아 내야 했다.


믿고 있던 신을 탓했다. 나는 아버지가 필요 없다고 그토록 기도했건만, 그 기도가 하늘에 닿기를 바라며 최선을 다해 착하게 자랐건만. 그날 이후 나를 살펴주지 않는 신을 마음으로 등졌다. 믿는 사람인 척하며 계속 성당에 다녔다.


지금은 알고 있다. 신은 그런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은 기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가을에 수술한 아버지는 겨울 초입에 퇴원했다. 자신이 살아온 50년이라는 시간을 깨끗이 지운 채 집으로 돌아왔다. 기억 상실뿐 아니라 아기가 된 아버지는 24시간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남겨졌다.

 

아버지는 엄마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집에서 나랑 마주치면 누구냐고 묻기도 했다. 잘 걷지 못해서 자주 넘어졌다. 말은 어눌했고 다른 사람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혼자서는 집 앞도 나갈 수 없어서 다섯 살 난 딸의 손을 잡아야 밖에 나갈 수 있었다.


엄마는 아버지를 불쌍히 여겼다. 나는 그런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고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다. 상처만 주고 해 준 것도 없으면서,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남겨진 아버지가 짐처럼 여겨졌다. 아버지의 책임과 의무를 전혀 하지 않았는데, 왜 나는 자식 된 도리를 해야만 하는가. 사회가 기대하는 보편적 역할과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충 된 마음이 엉켜 풀리지 않았다.     


20년이 흐른 지금도 그 마음은 여전하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보니 엉킨 마음이 더 단단히 뭉치기도 한다.

밝게 웃는 아이를 보며,

긴장 없이 편히 자는 아이를 보며,

한없이 행복하다가도 가슴 언저리에서 울고 있는 나를 만나게 된다.


어린 내가,

내 아이를 보며 부러워하고 있을 때,

나는 아버지가 더욱 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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