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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경 Oct 25. 2023

나의 할머니

96세의 할머니는 얼마 전 요양병원에 들어가셨다. 들어가기 전, 아버지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할머니는 엄마에게 처음으로 미안하다고, 못난 아들이랑 살아줘서 고맙다고 했단다. 눈물이 났다는 엄마.

     

알고 싶지 않은 일들을 엄마는 내게 전하셨다. 아무렇지 않게 듣고 있었지만, 과거에 새겨진 기억들이 선명해지며 엷게 아픔이 느껴졌다. 다듬어지지 않은 날카로운 말도 올라왔다. 머뭇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는 엄마에게 내가 선수 쳐 말했다.


“할머니가 나한테는 미안하다고 안 하셔? 왜 나한테는 사과 안 해? 나는 할머니 보고 싶지 않아. 여태 안 보고 살았잖아. 그리고 할머니, 나한테 어떤 것도 기대하면 안 되지. 딸년한테 뭘 기대해.”

     

예전 같지 않은 엄마는 내 눈치를 살폈다. 할머니께 인사라도 드리는 건 어떻겠냐는 말씀은 결국 하지 않으셨다. 다만, 인제 그만 잊으라며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말라고 하셨다.  다 용서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는 엄마. 나는 사과도 받지 못했고 마음이 좁디좁아 아직 그럴 생각이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소설이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할머니들은 인자하고 따뜻하던데. 자식은 미워할지라도 손주는 끔찍이 여기던데. 나는 단 한 번도 나의 할머니에게서 온기를 느껴본 적이 없다.


대학 합격 소식을 전했을 때, 계집애가 무슨 대학이냐며 빨리 돈 벌어서 아버지 부양할 생각이나 하라고 했다.

스무 살에 처음 아르바이트해서 받은 돈으로 부모님과 할머니의 속옷을 샀었다. 첫 월급은 부모님께 빨간 속옷을 선물하는 거라고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할머니께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을 때, 할머니는 뜯어보지도 않은 채 이런 거 필요 없으니 돈으로 달라고 하셨다.

그때의 무안함은 아직도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이 정도로만 끝났어도 예의 갖추어 마지막 인사를 드렸을 텐데. 내 기억 속 할머니는 말로서 나와 엄마의 가슴을 멍들게 했다.      


엄마가 아버지에게 숱하게 맞을 때마다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네가 맞을 짓을 하니까 내 아들이 때렸겠지. 그러고는 할머니의 딸이 사위에게 뺨을 맞자, 망치 달린 도끼를 들고 말씀하셨다. 저놈의 새끼 손모가지를 잘라 버려야 한다고.

엄마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저년은 애비 애미 없이 자라서 막돼먹었다며 엄마의 가장 아픈 곳을 헤집어 놓았다.

어떤 날은 나를 보며, 지어미 닮아서 저 모양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아버지가 마음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건 아들이 없어서라며 쓸데없이 딸만 낳았다고 엄마와 우리를 하찮은 사람 취급했다.


듣고도 참을 수밖에 없었던 말들이다. 아버지는 효자여서 할머니 말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할머니에게 저항하는 일은 아버지 손에 죽겠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그런 내가 동생 일로 할머니께 대든 적이 있었다.     


고집 세고 예민했던 둘째 동생은 한 번 울면 토할 때까지 울었다. 목청 또한 우렁차서 울 때마다 달래느라 곤욕을 치르곤 했다. 세 살이었던 동생은 그날도 목청껏 울고 있었다. 할머니는 티브이를 보며 말씀하셨다.     


 “저년은 달고 나오지도 못한 주제에 왜 소리 내서 운다니. 아이고, 시끄러운 년.”   

  

할머니의 말은 내 심장을 할퀴고 지나갔다. 자주 듣던, 엄마와 우리를 칭하는 이년 저년도 그날따라 참을 수 없을 만큼 치욕적으로 느껴졌다. 말대꾸 한번 없이 고분고분 자랐던 내가 할머니를 비아냥거리며 미친 사람처럼 동생에게 악을 썼다.

      

“넌, 왜 달고 나오지도 못한 주제에 소리 내어 울어! 너처럼 달고 나오지 못한 할머니가 시끄럽다잖아!”     


다행히도 할머니는 내 의중을 파악했다.     


“저년, 저거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지. 지어미 닮아 막돼먹은 년.”    

 

할머니도 나 들으란 듯이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내가 잘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나의 아버지에게, 당신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큰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오늘 밤 죽으면 그건 다 네 큰 딸년 때문인 줄 알아라!”     


할머니는 부서질 듯 수화기를 내려놓고 가방을 쌌다. 나를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할머니 집으로 가버렸다.

동생은 울다 지쳐 잠들었고,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만 집안을 떠다녔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하고 나니 온몸이 시큰거렸다.

나도 짐을 쌌다.


책가방에 옷가지 몇 개를 욱여넣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였다. 자초지종을 묻는 엄마에게 상황을 설명하는데 수화기 너머로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위협을 느꼈다. 나를 죽이겠다며 날뛰는 아버지의 음성. 엄마를 때리던 손이 나를 향하게 될 거라 생각하자 비참하게도 내 행동이 후회되었다. 할머니한테 그러지 말걸. 여느 때처럼 그냥 혼자 울고 말걸.      


엄마에게 집을 나가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외삼촌 댁에 가면 안전하지 않냐고 설득했지만, 엄마를 이길 수 없었다. 엄마의 마지막 한 마디에 가방을 풀고 주저앉았다. ‘네가 이러면 엄마가 더 힘들어져.’     


맞다. 나에 대한 아버지의 화는 더 큰 화를 불러올 것이다. 화풀이의 대상은 당연히 엄마일 테고. 전화를 끊고 엄마 말대로 집에서 대기했다. 한참 후 엄마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아버지의 화가 누그러졌으니 집에 갈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나를 참담하게 만드는 말이 더해졌다.    


 “네가 할머니 댁에 가서 무릎 꿇고 빌면 아빠가 용서해 준 데. 우리 집으로 다시 모시고 오면 없던 일로 하겠데.”     


엄마는 그렇게 아버지와 합의를 본 것이다. 내가 받았던 상처 따위는 언제나처럼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두려웠다. 엄마를 때릴 때의 그 손, 눈빛, 발짓, 욕짓. 수년간 봐 왔던 아버지의 모습은 엄마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깊은 밤, 초라하게 아버지에 이끌려 할머니 집으로 갔다.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다고 빌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주세요.”     


나는 텅 빈 눈으로 방바닥만 바라보며 말했다. 할머니는 아버지 앞에서 온화하고 자상한 어투로 나를 용서해 주겠노라 하셨다. 밤이 늦었으니 날이 밝으면 우리 집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했다. 처음 보는 할머니의 모습은 어색하고 낯설었다.


아버지도 할머니께 용서를 빌었다. 자식을 잘못 키워 그렇다는 아버지의 음성, 가슴 어딘가에서 쓴물이 올라왔다. 나를 키워? 도대체 아버지는 나를 어떻게 양육했고 어떤 교육을 했단 말인가. 이를 악물고 쓴물을 삼켰다.      


무릎을 꿇고, 인정할 수 없는 잘못을 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버지는 나보다 다섯 걸음 정도 앞서 걸었다. 나는 할머니와 닮은 아버지의 등을 보며 뒤따랐다. 내 옆에서 6차선 도로를 거침없이 달리는 차들이 자꾸만 나를 불러댔다. 이리 와. 뛰어들어. 아버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야. 네 치욕을 만회할 기회라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아버지가 두려웠던 만큼 죽음 또한 두려웠다. 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남겨주고 싶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걸으며 오늘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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